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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사학보 제45권.jpg
KCI등재 학술저널

허목의 정개청에 대한 서술과 남인의 ‘기축사화(1589)’ 인식

1589년(선조 22)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여립의 역모가 고변되었다. 정여립의 역모는 기축옥사로 이어졌고 호남의 동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이후 동인에서 분립한 남인은 억울하게 희생된 동인에 대한 신원(伸冤)을 추진하였다. 남인은 정여립의 역모에 대해서 재론하지 않았지만 정개청과 최영경 등의 신원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허목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정개청에 대해 저술하고 자신이 직접 편찬한 문집 『기언』에 「세변(世變)」과 「유림(儒林)」이라는 항목에 편재하였다. 허목은 「세변」과 「유림」을 통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희생되었던 것처럼 정개청도 사화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허목의 정개청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나주 등지의 호남의 사족에게 영향을 미쳤고, 나주의 사족이 주도하여 1690년(숙종 16)에 허목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1693년(숙종 19)에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나주의 미천서원은 경향(京鄕)의 남인이 결집하는 거점으로 나주 인근에 부임하는 남인 관리의 방문이 이어졌다. 또한 남인은 1706년(숙종 32)에 허목의 문집 『기언』을 간행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1721년(경종 1)에 『기언』을 간행하였다. 미천서원을 방문한 남인 관리는 『기언』을 인쇄하여 소장하고자 하였는데 화순현령에 부임하였던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도 미천서원의 운영과 중수(重修)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기언』을 소장하게 되었다. 미천서원에서 『기언』을 간행하여 보급하면서 남인은 허목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하였으며 정개청과 기축옥사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인의 기축옥사에 대한 인식은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동남소사』를 정리하면서 기축사화라고 평가하였다. 황덕길이 편찬한 『조야신필』에도 이러한 남인의 인식이 반영되어 기축사화라고 규정하였다.

Sarim(士林), who entered the central government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imed for politics based on Confucian ethics.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Sarim was divided into conflicts over the liquidation of the politics of the Cheokshin(戚臣), and the voice of Sarim, who demanded the liquidation of the politics of the Cheokshin, grew louder. Seo-in tried to break the political situation led by Dong-in by maintaining a friendly attitude toward the Cheokshin. On the other hand, the Dong-in confronted the Seo-in, insisting on the liquidation of the politics of the Cheokshin. Jeong Yeo-lip's rebellion occurred in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Dong-in and the Seo-in. Although Honam's Dong-in was politically destroyed by Gichukoksa(己丑獄事), Nam-in, who was separated from the Dong-in, promoted the identity of the Dong-in who was killed unfairly. In particular, Heo Mok emphasized that he was politically victimized by writing 「Sebyeon(世變)」 to restore the honor of Jeong Gae-cheong and Choi Young-kyung. Futhermore, Heo Mok clearly revealed recognition of Gichukoksa by placing alongside Jo Gwang-jo of Gimyosahwa(己卯士禍). These interests and efforts of Heo Mok influenced the Honam family, including Naju. In 1690, A Confucian academy was established in Naju to orient Heo Mok. Since then, Michon seowon in Naju became the stronghold of Nam-in. Nam-in, who was appointed near Naju, visited Michon seowon and tried to print a collection of Heo Mok's writings. Jeong Jae-won, Jeong Yak-yong's father, was also appointed as Hwasun County's governor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of Micheon Seowon. In the process of discussing the reconstruction of Michon seowon, Nam-in, including Jeong Jae-won, wanted to keep a collection of Heo Mok's writings. Heo Mok's assessment of Gichukoksa is expected to become more widely known through his writings. Thus, the perception of Nam-in who wanted to reevaluate Gichukoksa as ‘Gichuksahwa(己丑士禍)’was reflected in Jeong Yak-yong's 『Dongnamsosa(東南小史)』 and Hwang Deok-gil's 『Joyasinpi(朝野信筆)』.

Ⅰ. 머리말

Ⅱ. 허목의 『기언』과 정개청에 대한 서술

Ⅲ. 『기언』 간행과 남인의 당론서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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