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은 대유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학통을 이어받아 의리론(義理論)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함으로써 올곧은 선비정신이 내면화되었다. 그는 조국이 쓰러져가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혁신유림으로 전환하면서 협동학교의 설립과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병으로 국내에서의 구국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만주망명을 단행하고, 서간도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시작으로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신흥학교(新興學校)․백서농장(白西農莊)․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을 조직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더욱이 일송은 당시 이념과 전략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총장․국민대표회의 의장․혁신의회 의장 등을 맡아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시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그의 멸사봉공(滅私奉公)과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선비정신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지도자는 높은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국민에 헌신․봉사해야 한다는 사실, 둘째,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셋째,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국민통합을 선도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Il Song(一松) Kim Dong-Sam(金東三) as an innovative confucian was one of the greatest independence activists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based on the Sun-bi spirits. In order to achieve the national independence, he went through various sufferings. In the early years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he had developed a mass-education campaign through establishing a cooperative school(協 同學校) and the Andong Branch of Korean Association(大韓協會安東 支會). After the annexation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in 1910, he took asylum in Manchuria. In there he established various base camps for an anti-Japanese struggle such as Kyung Hak Sa(耕學社), Bu Min Dan(扶民團), Korean People Association(韓族會), Sin Heung Military School(新興武官學校), and Bak Sye Farm(白西農莊). And at the same time he made an effort to integrate the division and conflicts among many kinds of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Like this, Il Song devoted his whole life to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Therefore today's political and social leaders have to learn his Sun-bi spirits such as giving up life for justice(捨生取義).
Ⅰ. 문제의 제기
Ⅱ. 일송의 성장배경과 선비정신
Ⅲ. 구국계몽운동과 협동학교의 설립
Ⅳ. 서간도 망명과 독립군기지 건설
Ⅴ. 독립운동계의 분열 극복과 통합운동 주도
Ⅵ. 맺는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