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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신라 범패와 일본 쇼묘의 정체성

“당나라 도영(道榮)이 전한 전경창례(轉經唱禮)에 쇼묘를 통일했다”는 『속일본기』, “엔닌이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워온후 일본 쇼묘가 시작되었다”는 등, 오늘날 일본 쇼묘의 원류는 일제히 중국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중․일 불교역사 기록을 보면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속일본기』가 쓰여진 시기의 일본은 범선을 몰고와 신라를 괴롭히고, 신라는 일본 사신을 만나주지 않는 등, 양국 간의 갈등이 『삼국사기』 곳곳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 『속일본기』저자는 신라불교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불교사에서 한국을 지우고 인도・중국・일본의 삼국불교를 강조해온 것은 『이조불교』(1929)의 저자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사관이다. 한반도 불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나라(奈良)시기에는 의례 율조에 종파간의 차이가 없었고, 명칭도 ‘범패’였다. 교토천도 이후 국력이 강해진 헤이안시기에 통일신라를 넘어서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기 위해 청익승을 파견했지만 대개 단기간에 그쳤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 무박절의 당풍 범패를 단기간에 익혀 와서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태종의 사이쵸와 엔닌은 모두 한반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도다이지에서 계를 받았고, 엔닌이 당나라에 간 때는 법랍 32년으로 한반도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염불과 범패가 익을 대로 익은 상태였으며, 당나라에서도 의례와 범패에 관한 경험은신라 적산법화원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일본의 불교의례에는 엔닌이 적산법화원에서 경험한 강식의례와 사찰구조가 많다. 후대에 이르러 나라불교는구불교로 퇴락했지만 도다이지를 중심으로 한 의례 율조는 천태종과 진언종 쇼묘의 전거가 되어 확산되었다. 따라서 일본 쇼묘는 신라의 범패와 산동적산원에서 보고 배운 범패를 제외하고는 그 정체성을 말할 수 없다. 초기에 신라와 유사했던 범패는 가마쿠라시기 신불교로 인해 일본색이 짙은 악리와 유리(ユリ시김새)에 의해 현재의 일본색이 짙은 쇼묘로정착되었음을 일본불교사가 말해 주고 있다.

Ⅰ. 머리말

Ⅱ. 아스카와 나라의 구불교 범패

Ⅲ. 청익승 귀국 이후 신불교의 쇼묘

Ⅳ. 구불교 범패와 신불교 쇼묘의 관계

Ⅴ. 한국 범패와 일본 쇼묘의 사적(史的) 배경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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