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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문화 제15호.jpg
학술저널

고종조 중창된 경복궁 후원 규모 및 건축 구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rea of the Rear Garden and its Architectural Composition at Gyeongbok Palace during King Gojong'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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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종조 중창된 경복궁 후원인 신무문 북측 후원 및 그 측후면의 백악산 후원의 두 후원을 대상으로 그 규모와 건축 구성에 대하여 분석 고찰하였다. 신무문 북측 후원은 옥연정 영 역, 경무대 영역, 경농재 영역의 세 권역으로 이루어졌지만, 경무대 영역이 중심이 되어 인재 선발· 양성과 군사 훈련을 지속하며 자주·자강을 도모한 핵심 근거지였으며, 후원이라는 명칭과 달리 통치 영역인 궁궐로서 환궁 장소로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백악산 후원은 기본적으로 수려하고 울창한 경관을 갖춘 동시에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백악산의 신성성을 그 근간으로 삼고서 경복궁 재건 당시 궁성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의 안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으나, 1880년대의 궁성 위쪽으로부터 산꼭대기까지 토성 축조와 태화궁 건립에 따라 기존 경복궁 안전 확보 기능을 강화하고 통치 기능까지 갖춘 후원으로 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후원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경무대 영역 및 태화궁 등을 중심으로 하여 통치 기능을 하였던 경복궁의 중추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궁궐 후원의 개념과 관련하여 독특한 한국적 특성과 함께, 독자성 및 규모는 물론이고, 격변의 시대에 맞선 고종의 노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으로부터 신무문 후원 내에서 이건되었지만 그 원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옥연정이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고종이 이곳에 들러 남긴 시 ‘등옥련정登玉蓮亭’이 전하는 살아있는 문화재로서, 문화재 지정 승격에서 나아가 현존하는 ‘천하제일복지’ 각자 암석 및 〈북궐후원도형〉 등 자료를 통해 원 위치 이건도 검토 가능하여 신무문 북쪽 후원의 역사성 회복에 매우 중요한 문화 유산임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자행된 경복궁의 기록 왜곡 조작 내용도 고찰한 바, 본 연구가 법궁 경복궁의 규모와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청와대 영역과 백악산 일대를 궁역으로 삼은 경복궁 전체 영역에 대한 우선 사적 가지정 후 사적 지정 확대와 경복궁 후원 궁역에 대한 발굴 조사 및 경복궁 복원 정비에 필요한 기초 학술 자료가 되도록 하였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and review the area and architectural composition of the Rear garden of Gyeongbok Palace which was comprised of the Garden on the north side of Sinmumun and the Baegakssan Garden constructed during King Gojong’s Reign. The former consisted of three areas; Okyeonjeong, Gyeongmudae, and Gyeongnongjae, and it was a key base for selecting talented people, training them, continuing military training, and promoting self-reliance with the Gyeongmudae area at its center, however unlike its name, it was a governing area. The latter, which was situated and based on the beautiful and dense scenery and the sacredness of the mountain to protect the safety of both the country and the royal family, was created to improve the protection of Gyeongbok Palace that was surrounded by a fortress during the palace’s reconstruction, and it can be seen that, as the earthen fortifications were built from the top of the fortress to the top of the mountain and with Taehwagung Palace also built in the 1880s, he Palace’s security function was strengthened and the function of governance of the Baegaksan Rear Garden was established. From this, it was found that these were the central places of Gyeongbok Palace, which had the function of a garden, but actually served as a function of governance centered on the Gyeongmudae area and Taehwagung Palace. Also in relation to the concept of a palace garden in Korea, it was possible to grasp King Gojong's hard effort against the turbulent times as well as to recognize the garden's unique characteristics as a Korean palace garden and enormous size. In addition, the contents of the record distortion and manipulation of Gyeongbokgung Palace conducted by Japa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were also considered. This study was made to reveal the area size and history of Gyeongbok Palace and to present the basic academic data necessary for the excavation and restoration of the rear garden of Gyeongbok Palace.

Ⅰ. 머리말

Ⅱ. 고종조재건·증축된경복궁개요 및 일제강점기 일본의 경복궁기록내용고찰

Ⅲ. 경복궁후원규모 및 건축 구성고찰

Ⅳ.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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