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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간도침공에 대한 일본의 언론 보도와 인식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을 중심으로

본고에서는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을 통해 침공 시작(1920년 10월)에서 철수완료(1921년 5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군의 간도침공에 대한 당시 일본 사회 인식의 단면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가 기존의 육군성·외무성이 기록한 보고서나 공문서 기록에 의거했던 연구와 다르게 규명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첫째, 육군성 보고서나 공문서에 기반한 이미지는 간도침공은 중일 간 공동침공 합의가 순탄하게 진행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요미우리신문으로 밝혀진 실제 상황은 북경 정부의 강한 ‘불승인’ 반발에 부딪혀 어렵게 겨우 얻어낸 ‘일시적 양해’였다. 즉, 무늬만 ‘공동침공’일 뿐 실제로는 일본의 ‘단독침공’이었던 것이다. 둘째, ‘출병’에 대한 양해를 얻은 지 2주 뒤인 11월 2일 일본 정부에서는 중국 정부의 ‘철수’ 요구를 수락해야 했다. 다만 현지 주둔 중인 군부와 치안유지를 우려하는 외무성의 입장은 최대한 ‘지연 철수’하거나, 재출병에 대한 중국 정부의 사전 양해를 받는 것을 협상 카드로 내세웠다. 이러한 일본 측의 태도에 대해 중국 정부는 ‘월권(越權)’ 혹은 ‘주권침해’라는 강경 대응을 지속했다. 일본 측의 ‘선(線)을 넘는 행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끈질긴 교섭의 실상이 요미우리신문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 점인 것이다. 셋째, 중국 측 항의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신속한 철수와 전원 철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채 철수 지연 혹은 경찰관 교체 파견이라는 계략을 획책하는 과정에서 ‘간도출병’ 건은 도리어 전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배일(排日) 여론을 확산시켰다. “영국·프랑스·미국 열강으로부터도 간도출병에 관한 설명을 요구”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영국의 경우 의회에서 ‘간도문제’가 토의 안건으로 상정될 정도였다. 간도에 있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그들의 이념을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한 미즈마치 육군 대좌의 ‘실언(失言)문제’가 신문 사설(社說)로도 크게 다뤄질 만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미즈마치의 발언(성명서)의 표면적 문구나 군인의 월권적 외교 행위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륜적 행위인 민간인 학살의 진위 규명은 회피했고, 오히려 장암동 부근의 사살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날조(捏造)’ ‘중상(中傷)’ ‘와전(訛傳)’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요미우리신문이 가진 인식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In this paper, through the Yomiuri Shimbun, the aspect of Japanese society‘s perception of Gando Invasion was reviewed during the period from departure (October 1920) to withdrawal(May 1921).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is review and research based on reports or official records recorded by the Ministry of Army and Foreign Affairs? First, images based on reports or official documents from the Ministry of the Army describe the invasion of Gando as if the ’joint invasion‘ agreement between China and Japan went smoothly, but the actual situation revealed by the Yomiuri Shimbun met with strong ‘disapproval’ opposition from the Beijing government, making it difficult. It was a 'temporary understanding' obtained. In other words, only the pattern was a ‘joint invasion’, but in reality it was a ‘solo invasion’ of Japan. Second, on November 2, two weeks after obtaining permission for ‘invasion’ the Japanese government had to accept the Chinese government’s request for “withdrawal.” However, the position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which is concerned about security maintenance with the military stationed in the country, is to ‘delay withdrawal’ as much as possible or to obtain prior consent from the Chinese government for ‘re-invasion’ departure as a negotiating card. In response to this attitude of the Japanese side, the Chinese government continued to respond hard, calling it “excessive power” or “infringement of sovereignty.” It is only through the Yomiuri Shimbun that the reality of the Chinese government's strong protests and persistent negotiations against Japan's “crossing the line” was revealed. Third, despite the protests from China, the Japanese side did not understand the promise of a speedy withdrawal and withdrawal of all members, and in the process of planning a strategy of delaying the withdrawal or dispatching replacement police officers, the ‘Invasion of Gando’ received global attention on the contrary spread public opinion. In particular, in the case of the UK, the ‘Gando issue’ was brought up as a topic of discussion in the parliament. However, the essence of the problem is not limited to the superficial wording of Mizumachi's statement or criticism of the military's extravagant diplomacy, but also avoided ascertaining the authenticity of the massacre of civilians, an inhumane act. It is dismissed as nothing more than ‘fabrication(捏造)’. This part can be said to be the limit of the perception of the Yomiuri Shimbun.

Ⅰ. 머리말

Ⅱ. ‘공동출병’ 인식

Ⅲ. 철수 논의와 후속 대책 교섭

Ⅳ. 배일(排日) 여론의 확산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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