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창 후 여러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사대교린체제(事大交鄰體制)’로 정립하였다. 이 체제 하에서의 ‘교린(交隣)’이라는 개념은 이제까지 중국으로부터 책봉(冊封)을 받은 피책봉국끼리의 대등한 관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의 ‘책봉(冊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조선의 교린 관계를 본다면,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불합치하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주로 일본 사신에 대한 접대로 한정하여 그 상황을 살폈는데, 일본 내에서도 책봉을 받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와 책봉을 받지 않고, 그저 하나의 지방에 불과한 대마도(對馬島)의 사신이 모두 ‘교린’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첫 번째 불합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신의 접대 문제에 있어서도 일본국왕사가 명의 책봉을 받았던 시기나 책봉을 받지 않았던 시기나 모두 ‘교린’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고, 책봉의 여부가 접대의 양상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를 통해 조선은 책봉과 관계 없이 사대 대상을 제외한 조선 주변국을 ‘교린국(交隣國)’이라 명명하고, 교린체제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교린체제를 구축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전기에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행해진 ‘교린(交隣)’, 혹은 ‘교린체제(交隣體制)’는 흔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 흔히 얘기되던 '탈중화적 교린체제'의 의미를 일찍부터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After Joseon was founded, Joseon established a relation as 'Sadae-Gyorin system' with various regions. According to this system, It was recognized that an idea as 'Gyorin' is called an equal relation with countries which invested from China. But when a Joseon's Gyorin relation is seen with the premise as 'Investiture' from China, it's possible to find the suspicious circumstances at too many parts. It was limited and checked at the reception to a Japanese envoys by this research. As a result : First, all envoys that the Japanese envoys(日本國王使) which invested and the Tsushima's envoys who didn't invested were included in the reach of 'Gyorin' in Japan. Second, All Japanese envoys were included in the reach of Gyorin, all the time when it wasn't invested and it was invested from China.I find out that Joseon neighboring countries were named 'Gyorin country' without the one by which it was invested from China, and Joseon built the original Gyorin system to soak these countries in the category of the Gyorin system.
Ⅰ. 머리말 - 조선의 ‘事大交隣體制’
Ⅱ. 조선 전기 대일 교린체제의 성립
Ⅲ. 사신 접대에 나타난 대일 교린체제
Ⅳ. 맺음말 - 조선 시대 '交隣'의 再考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