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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사학보 제46권.jpg
KCI등재 학술저널

조선 숙종대 ‘濁南’의 형성과 인적 교류

사천목씨, 여흥민씨, 진주유씨를 중심으로

본 논문은 조선 숙종 초반 근기남인의 정치적 분화 과정에서 주로 허목과 이익의 학맥을 이은 ‘청남’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는 상황과 달리 ‘탁남’의 향방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검토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숙종 초년 당시 근기남인들의 통혼과 교유, 각 가계의 행보에 대한 각 자료를 살펴보면 청남과 탁남의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정황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근기남인을 청남과 탁남의 대립으로 설정한 사료는 대부분 경종대 이후의 당론서나, 『숙종실록』의 사평이었다. 특히,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인현왕후에 대한 名義罪人으로 낙인이 찍혔던 여흥민씨 민암과 사천목씨 목내선, 안동권씨 권대운 등이 탁남계로 구분되었다. 문외파 혹은 청남이 등장한 것은 경종말년에서 영조 초년(무신란)을 즈음하여 남인들의 생존을 위해 남인 내에서 명의죄인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들을 선별하였고 그들이 이른바 목민류라 불리는 3개의 가문이었다. 탁남은 남인 내부에서 스스로 설정하고 구분지은 존재라는 점이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으며 숙종 당대의 탁남이란 정치세력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숙종 당대 정치에 참여했던 남인들은 ‘근기남인’이라는 동질성을 더 강하게 보유하고 있었음을 ‘목민류’로 지목된 사천목씨와 여흥민씨, 그리고 진주유씨의 통혼망과 교유양상, 그리고 사승관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탁남 목내선의 사승관계에서 보이는 청남 허목과 이서우와의 친근한 관계, 탁남 유명천과 청남 권유, 이서우, 채팽윤과의 돈독한 관계, 탁남 유명천과 청남 이동규의 통혼 관계, 탁남 민취도와 청남 허목의 사승관계, 탁남 민암과 청남 이우정의 사돈 관계, 탁남 목내선과 청남 이담명의 통혼 관계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통혼과 사승, 친밀한 교유 관계를 당대 청남과 탁남 인사로 분류된 이들 사이에서 찾을 수가 있다. 이들 탁남과 청남으로 구분된 근기남인 인사들은 최소한 숙종 초년 함께 정국을 운영할 당시에는 상호 교유하고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물론, 정책 입안이나 서인에 대한 처벌 등 정국운영과 관련한 근기남인 내부의 각 인사들에 따른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숙종 당대의 정책 입안을 결정한 당대 핵심 인사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분명해질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추후에는 분석대상을 당대 근기남인 전체의 가계로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으며 숙종 당대를 넘어 경종대부터 영조대까지 잔존한 근기남인의 후손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차후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 범위를 넓히고자 한다.

This paper began to be reviewed with suspicion of the political separation of the 'Keunki-namin(近畿南人)' of King Sukjong of the Joseon Dynasty. At that time, I distrusted the results of the existing research that it was divided into 'Cheongnam(淸南)' and 'Taknam(濁南)', and reviewed it based on the data at that time.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Keunki-namin' at the time were not divided and were blood-related, academic, and politically intimate. This began with the separation of those who had become political sinners within the 'Keunki-namin' in order for their descendants to survive politically. As a result, those who could not recover politically at the time were named 'Taknam' and other 'Keunki-namin' survived as 'Cheongnam' and were able to engage in political activities afterwards. Of course, their confrontation and division remain to be examined more closely, such as policy issues and political trends at the time. Nevertheless, I think this paper is meaningful because it emphasized that their differentiation was not confirmed based on their personal relationship patterns at the time.

Ⅰ. 머리말

Ⅱ. 숙종 초년 근기남인 주요 가계와 ‘睦閔柳’ 3가의 탁남 각인

Ⅲ. ‘목민류’ 가계의 형성과 근기남인내의 인적 교류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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