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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연구 제33호.jpg
KCI등재 학술저널

독도주권과 일본의 조약적 권원 주장에 대한 국제법적 검토

올해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을 비롯한 48개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청산하고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체결 당시 이미 이 조약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청산하기 위한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조약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냉전체제의 대두로 인해 징벌조약에서 반공조약으로 기조가 전환되면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관대한 강화조약’이라는 평가와 함께, 가해국임에도 오히려 최대 수혜국이 된 일본이 역설적으로 이 조약을 전제로 동아시아평화공동체에 역행하는 영토갈등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1905년 독도 침탈에 대한 국제법적 법리로 무주지 선점론을 주장하던 일본 정부가 본원적 권원으로서의 국제법상 흠결을 대체하기 위해 17세기 일본의 고유영토론을 제기했으나, 1693년 안용복 피랍 이래 시작된 울릉도쟁계 이후 에도막부의 1696년 도해금지령과 메이지정부의 1877년 태정관지령에 의해 역사적 권원으로 정립이 불가한 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 국제법학계가 동원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무주지 선점론의 재소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작성 과정에서 카이로선언에서 천명한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본 정부가 제기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의 정책적 기반을 구축해온 일본국제법학회의 권원 연구에 내재된 법리적 왜곡의 본질적 문제점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전시 연합국이 시행한 대일영토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1943년 카이로선언과 1945년 포츠담선언이다.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영토정책에 있어서 기본원칙 문서이며, 포츠담선언 제8항의 규정으로 인용되어 연합국의 공식적인 영토정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선언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일본이 약취한 모든 영역에서의 추방을 비롯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해방과 독립 등으로 구성되었다.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의 계승을 통해 전후 일본의 영토를 특정하였으며, 일본에 대한 항복요구와 전후 처리원칙을 결정함으로써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종전합의의 기본원칙이 되었다. 카이로선언의 이행과 일본의 영토를 규정하는 제8항은 일본의 주권이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및 연합국이 결정하는 부속 소도서로 국한한다고 규정하였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시까지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한다는 방침하에, SCAPIN 677호(1946. 1. 29) 및 SCAPIN 1033호(1946. 6. 22)를 통해 일본 점령 기간 내내 독도를 일본의 통치대상에서 제외되는 지역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독도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5차 초안까지 한국 영토로 명시됐다. 그런데 제6차 초안에서 독도는 일본의 정치고문인 William J. Sebald의 전보(1949년 11월 14일)와 의견서(1949년 11월 19일)를 통한 로비로 인해 일본 영토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제7차 초안 이후 최종 초안에서는 독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채 조약문에서 생략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대한 일본국제법학회의 조약적 권원 연구와 관련하여 국제법 법리에 대한 왜곡의 문제점을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SCAPIN 677호 제6항에서 부속 소도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아니라는 규정과 관련하여, 일본 국제법학자들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한 SCAPIN 무효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배제조항인 제6항은 제5항과 관련하여 예시적인 규정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제5항은 본부가 발령하는 모든 명령에 일본의 영토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일본의 영토 범위는 계속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제6차 초안에 대한 시볼드의 로비와 관련하여, 시볼드는 “안보 측면에서 볼 때 독도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과 결부된 사안”으로 제안했다.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6차 초안에서는 독도를 일시적으로 일본 영토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조약문에는 독도 표기 자체가 사라졌으며, 시볼드의 로비도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전제에서 제작된 1951년 8월 일본 해상보안청의 ‘일본영역참고도'에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표기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1951년 일본에 공개되지 않은 러스크 서한과 관련하여, 시볼드의 로비에 의한 일시적인 미국의 대일정책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의 대두로 인한 국제정세 변화의 활용에 더하여 일본이 제공한 허위정보를 바탕으로 한 1905년 독도에 대한 무주지 선점론을 재소환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독도는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이전에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1904년 1월 21일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대해 1904년 2월 6일 진해만과 마산시 점령을 기점으로 시작된 일본의 독도침탈과 조약강제는 국제법상 전형적인 불법이자 원천무효에 다름아닌 것이다. 따라서 현재진행형인 일제식민주의의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본이 앞세우는 국제법상 합법성과 정당성조차 결여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의 과제는 역사적 성찰과 국제법적 정의를 통해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This year mark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entry into force of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Forty-eight allied power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the victor of World War II, and Japan, the defeated country, signed the treaty in 1951 to clear up responsibility for the Asia-Pacific War and establish a peace regime in East Asia. However, at the time of the signing of the treaty, it was intended to settle Japan's war responsibilities, but on the other hand, it received a contradictory evaluation as a treaty to build a Cold War regime in East Asia. It is because Japan, which is paradoxically the biggest beneficiary even though it is a perpetrator, is causing territorial conflicts that run counter to the East Asian peace community, presupposing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which is evaluated as an unprecedented “generous peace treaty” as its stance has shifted from a punitive treaty to an anti-communist treaty due to the rise of the Cold War regime. On that premise, it is worth noting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Japanese society of international law are re-summoning the doctrine of terra nullius through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because it was impossible to establish Japan's historical title to Korea's sovereignty over Dokdo recognized by the Edo Shogunate's prohibition of the crossing the seas of 1696 and the Dajokan directive of state in 1877, since the Ulleung Island dispute that began after the capture of An Yong-bok in 1693. Thus, it is an important task to identify the essential problem of legal distortion inherent in the research of the title of the Japanese society of international law that has been building the policy basis of the Japanese government's claim to Dokdo, as the essence of violence and greed declared in the Cairo Declaration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The most important decisions in the territorial policy toward Japan implemented by the Allied powers in wartime were the Cairo Declaration of 1943 and the Potsdam Declaration of 1945. The Cairo Declaration is a document of basic principle in the territorial policy of the Allied Powers and has been cited as the provisions of Article 8 of the Potsdam Declaration, thus establishing itself as the official territorial policy of the Allied Powers. The declaration consisted of deportation from all areas that Japan had taken by violence and greed, and liberation and independence of Korea at the appropriate time. The Potsdam Declaration specified the territory of postwar Japan through the succession of the Cairo Declaration, and it became the basic principle of the Allies' agreement at the end of the war by determining the demand for surrender to Japan and the treatment principle for postwar Japan. Article 8, which defines the implementation of the Cairo Declaration and the territory of Japan, was specific that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determined by the Allies. Under the policy of separating Dokdo from Japan after World War II until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entered into force, the Allied Powers General Headquarters defined Dokdo as an area excluded from Japan's rule throughout the allied occupation of Japan through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s (SCAPIN) 677 (Jan. 29, 1946) and SCAPIN 1033 (June 22, 1946). Along with this continuation, Dokdo was specified as Korean territory until the fifth draft of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By the way, Dokdo was changed to Japanese territory in the sixth draft due to lobbying through a telegram (Nov. 14, 1949) and written opinion (Nov. 19, 1949) of William J. Sebald, a political adviser to Japan. However, in the final draft after the seventh draft, Dokdo was omitted from the text of the treaty without being mentioned specifically.

1. 서론

2.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연합국의 대일영토정책 개관

3. 일본 국제법학계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관련 권원 연구 검토

4.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관련 국제법적 권원 법리의 문제점 검토

5.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