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백제연구 제77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관산성 전투와 그 의의

본고에서는 관산성 전투의 발발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이의 성격과 의미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관산성 전투의 분수령인 성왕의 죽음은 12월이며, 토착세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제와 신라는 협력하여 551년 9월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551년 10월 百合野塞 전투에서 두 나라의 공조는 틈이 생겼다. 고구려는 이를 기회로 신라에 접근하였고, 그 매개 역할을 한 인물은 惠亮法師였다. 고구려는 비교적 쉬운 상대인 신라의 한강 하류유역 점령을 용인해주면서 두 나라 사이에 이간계를 썼다. 결국 백제는 신주를 설치한 신라의 압박에 한강 하류유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한강 하류유역 포기로 신라는 한성, 고구려는 남평양을 차지하였다. 두 나라 사이 밀약의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성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유화책을 추진하였다. 두 나라의 혼인으로 신라의 의도와 회유를 유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사실상 신라와 전쟁을 준비하는 양면책을 사용하였다. 왜와 가야의 참전을 독려하면서 국내의 반대 의견을 무마하며 전쟁 준비를 한 것이다. 이러한 강온전략을 추진하며 왜의 구원병이 554년 6월 도착하자 바로 7월 관산성 전투가 발발한 것이다. 관산성 전투가 국제전적인 양상으로 확대된 것에 이 전쟁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관산성 전투의 개시는 7월이며, 종료 시점은 12월임을 확인하였고, 『三國史記』는 시작 시점에서, 『日本書紀』는 종료 시점에서 이를 정리한 것이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우세하였지만 후방에서 지원한 성왕이 관산성을 방문하다 전사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후방의 지원을 받지 못한 위덕왕이 포위를 겨우 뚫고 탈출하면서 관산성 전투는 종결되었다. 관산성은 사방이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는 이를 공격함으로써 신주와 사벌주, 그리고 중앙군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하였다. 전쟁에는 3만 여명의 백제 군사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참여하였다. 이에 맞선 신라는 처음 사벌주와 중앙군이 방어하였으나 신주의 군사가 합세하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특히 고간 도도는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신라는 지리와 정보에 밝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성왕을 구천에서 사로잡음으로써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성왕이 오합지졸의 병사에게 당했다는 표현은 이들의 공로가 매우 컸음을 보여준 것으로, 토착세력의 향방이 관산성 전투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This study would investigate the character and significance of the Gwansan Fortress Battle by examining its background, development process, and result. As a result, it was noted that King Seong’s death, the turning point of the Gwansan Fortress Battle was in December, and the attitude of the native force was an important variable. Baekje and Silla cooperated to occupy the lower reaches of the Han River in September 551. However, in Baekhabyase Battle in October, 551 caused a breach in the cooper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Goguryeo approached Silla, taking this opportunity, and the figure who mediated this was Buddhist Monk Hyeryang. Goguryeo alienated between the two countries, accepting the occupation of the lower reaches of the Han River by Silla, the relatively easier partner. Consequently, Baekje could not help but give up on the lower reaches of the Han River pressed by Silla that set up Shinju. King Seong nevertheless used a two - sided measure, promoting a conciliatory gesture of achieving matrimony with Silla while preparing a war against Silla. As King Seong promoted this tough and moderate strategy, Gwansan Fortress Battle broke out in July immediately after Wa’s reinforcements arrived in June 554. The significance of this war is the expansion of the Gwansan Fortress Battle to the aspect of an international war. Gwansan Fortress Battle began in June and ended in December. At first, Baekje troops were more powerful, but the shoe became on the other foot as King Seong who had supported them in the rear was killed while visiting Gwansan Fortress. Gwansan Fortress Battle ended as King Wideok who had not received support from the rear managed to escape, penetrating the siege. Gwansan Fortress was a four - way strategic point, and Baekje adopted a strategy of dispersing Silla troops by attacking that. Silla defended it with Sabeolju and Central Army at first, but it reversed the war situation as soldiers in Shinju joined the forces. Especially, Gogan Dodo was a native force of the region, and Silla seized the decisive chance to victory, capturing King Seong with help of people who were familiar with its geography and knew much information about it. Significantly, the direction of the native force was the turning point of Gwansan Fortress through this.

Ⅰ. 머 리 말

Ⅱ. 한강 점령을 둘러싼 백제·신라의 협력과 충돌

Ⅲ. 관산성 전투의 발발과 의의

Ⅳ. 맺 음 말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