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유관순 연구 제27권 제2호.jpg
KCI등재후보 학술저널

유관순 ‘발굴’의 맥락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희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관순을 거론하였다고 주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유관순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 실제로 친일 경력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는 박인덕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인덕은 이화여자중학교 동문을 중심으로 같은 학교를 나온 유관순을 알리는 활동을 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그가 대중을 상대로 의도적으로 유관순에 대한 이미지를 주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 사실 유관순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린 것은 박인덕이 아니라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이 유관순을 지면에 다룬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위기가 현실화된 시점이다. 경향신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경우, 남북 분단이 현실화될 것이라 걱정하고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 그 무렵 언론은 유관순을 ‘전 민족적인 민족해방투쟁’을 이끈 인물로 규정하였으며, 그를 따라 ‘전 민족’이 민족해방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언론이 상정한 ‘민족해방이 완수될 시점’은 ‘민주적인 통일 정부’가 수립되는 때였다. 유관순을 내세운 언론의 주장은 시대적인 분위기가 바뀜에 따라 대중의 기억 속에 잊혀졌다. 다만 교과서와 문학 작품에서 ‘전 민족적 단결’을 상징하는 표상은 이어졌으며, 국가주의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적절히 이용해 정치적 실리를 취하고자 했다.

Recently, some scholars have drawn attention by claiming that people with pro-Japanese careers mentioned Yu Gwan-soon to dilute their mistakes. This argument seems to have some persuasive power in that the person who actively promoted the Yu Gwan-soon commemoration project was actually Park In-deok, who had caused controversy over his pro-Japanese career. However, since Park In-duk focused on promoting Yu Gwan-soon, who was a student of the same school as Park graduated, Ewha Girls’ Middle School. In fact, it was not Park In-duk, but the Kyunghyang Shinmun that first informed the public of Yu Gwan-sun. There was a special reason for the Kyunghyang Shinmun to cover Yu Gwan-soon. As is well known, at that time, the crisis of the collapse of the US-Soviet Joint Committee was realised. The Kyunghyang Shinmun tried to send a message to overcome the division through left-right cooperation, worrying that the division of South and North Korea would become a reality if the US-Soviet Joint Committee broke down. At that time, the media defined Yu Gwan-sun as a figure who led the ‘national liberation struggle of the whole nation’ and emphasized that ‘the whole nation’ should complete the national liberation to the end. The “time point for national liberation” that the media assumed was when a “democratic unification government” was established. The media's claims of Yu Gwan-soon were forgotten in the public's memory as the atmosphere of the times changed. However, in textbooks and literary works, the symbol of 'national unity' continued, and people with a nationalistic political view tried to use it appropriately to gain political benefits. As a result, Yu Gwan-soon's representation was in danger of being misused politically.

Ⅰ. 머리말

Ⅱ. 유관순 기념사업의 기획 의도를 둘러싼 견해 차이 검토

Ⅲ. 경향신문 게재 유관순 소개 글의 맥락 분석

Ⅳ. 유관순 이미지의 변형

Ⅴ. 맺음말

참고문헌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