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조선 문인 이해응은 조선 순조 3년에서 4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계산기정≫을 썼다. 그는 정통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평생 과거 시험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51세에야 과거에 급제하여 식년 생원 3등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필자는 이해응이 쓴≪계산기정≫본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작자의 가경 황제에 대한 형상을 “호황”, “검박”, “웅호”로 요약하였다. 작자 이해응은 직접 중국에 가서 중국 생활을 경험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조선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형상화하는 타자(가경 황제 이미지)는, 그 자신의 가경 황제에 대한 체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성장하고 생활했던 조선의 사회, 역사환경과 어느 정도의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가 살던 조선 사회 민중들이 청황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요컨대, 이해응이 가경 황제의 이미지에 대해 묘사할 때, 통시적으로 내려온 조선 사회의 가경 황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미지에 대한 계승과 창조 그리고 공시적으로 조선 사회의 가경 황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미지가 얽혀있는 관계에 대해서 시간을 종축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해응 텍스트 속의 “호황”이미지의 형성은 17, 18세기 존주론을 이론근거로 하는 조선 중화주의라는 전체 사회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중화주의는 통시적인 사회 전체의 생각이었다. 작가는 한편으로 이족을 부정하는 가경 황제에 대해, 한편으로 자신의 나라인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조선 중화주의에 대한 긍지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이해응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조선 사절의 연행과 관련된 작품들의 분석을 통해, 가경 황제의 이미지를 검박, 근정, 지혜, 인의, 용감 등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성군의 이미지이다. 이것은 18세기 후기에서 19세기 초기 조선 문인들의 가경 황제에 대한 공시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는 “화이관”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해응의 가경 황제에 대한 이미지와 사회의 공시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를 비교한 후, “검박”이라는 이 교차점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당시 사회의 공시적이고 전반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직접 가경 황제를 본 후에야 면모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이해응 작품 속의 가경 황제 이미지와 공시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은 교차점이 없는 평행선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며, 오히려 통시적으로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더 깊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一. 序論
二. 既成的胡皇形象轉向正面的皇帝形象
三. 李海應與社會集體想像
四. 結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