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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논총 제83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근대 전환기의 관례 동향

이중구(李中久)가 5대 고문서를 중심으로

이 논문은 이중구가 5대 고문서 중 주로 간찰 자료를 대상으로 관례 실태를 분석함으로써, 근대 전환기 전통적인 양반 사대부 가문이 어떠한 방법으로 유교 의례를 전승해 나갔는지를 규명하고, 당시에도 관례의 의례가 존속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아울러 의례적 전통인 관례의 행례 과정과 그 변화에 주목하여 당시의 관례 동향을 살펴보았다. 관례(冠禮)는 성년(成年)이 된 사람에게 성인의 책임과 의무를 짊어주고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인의 자격을 공인하는 의식으로, 전통 유교 문화의 성인식으로 인식된다. 유교 문화에서 주요 의례가 되는 것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이며, 그중에서 가장 먼저 치르는 의식이 바로 관례이다. 조선 초기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중국 관례를 수용하고 제도적으로 실천을 권장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태조를 비롯한 임금들은 관례의 보편화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 연산군, 중종의 재위 기간에는 관례를 올리고 나서 사치하는 등 관례의 폐단에 관한 상소가 지속해 일어났다. 16세기부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림이 사족의 공인을 받으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에서 구한말에 이르는 시기에도 관례는 여전히 행해졌다. 그 당시의 관례는 종전의 ‘입지(立志)를 위한 관례’에서 벗어나 ‘혼례(婚禮)를 전제로 하는 관례’로 변모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독립적인 의례에서 벗어나서 다른 의례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관례는 그 의미가 축소되어 혼례에 종속되고 만 것이다. 이중구가 5대 고문서에서 현재 관례 기록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대부분이 1800년대 후기에서 1920년 사이의 자료들이다. 이 당시는 위정척사, 동학운동, 광무개혁 등이 일어났지만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도 우리의 전통 예절인 관례는 폐지되지 않고 존속되어 왔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의 예를 지키고 실천했기 때문에 일어난 성과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reality of Gwan-rye based on antique documents of Lee Joong-gu’s five generations, especially the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to investigate how the traditional Yangban noblemen during the period of transition to modern era inherited Confucianism rituals and proved that Gwan-rye existed at that time. In addition, it focuses on the process of Gwan-rye and its changes to look into trends of Gwan-rye at that time. Gwan-rye assigns responsibilities and duties of adults to those who have come of age and it publicly recognizes their qualifications of adults as members of family and society, so it is recognized as coming-of-age ceremony of traditional Confucianism culture. The four ceremonial occasions of coming of age, wedding, funeral, and ancestral rites are main rituals of Confucianism culture, and the first to be practiced among them is Gwan-rye. Early-and-mid Joseon was a period when Chinese Gwayn-rye’s were accepted and systematically recommended to be practiced. At the time, kings including Taejo put great effort to generalize Gwan-rye. During the reigns of Seongjong, Younsangun, and Jungjong, kings constantly received written opinions on negative effects of Gwan-rye including extravagance after Gwan-rye. Gwan-rye began to be generalized from mid-Joseon after the 16th century as Sarims were officially approved by Sajoks. Gwan-rye’s were still practiced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late Joseon. At that time, Gwan-rye was transformed from original ‘Gwan-rye for ipgi(立志)’ to ‘Gwan-rye as precondition for wedding.’ In late Joseon, Gwan-rye was not an independent ritual any more, but turned into a means of another ritual. The importance of Gwan-rye shrunk and it was subbordinated to wedding. Most of the materials in the antique documents of Lee Joong-gu’s five generation that can track records of Gwan-rye come from the year of 1898 and 1920. This period was a period of confusion due to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and Japanese occupation. With enforcement of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protests against it took place everywhere. Our traditional ritual Gwan-rye was not abolished, but continued to exist even in this period. It can be acknowledged as an accomplishment of protecting and practicing our rituals by our ancestors.

Ⅰ. 머리말

Ⅱ. 이중구가 5대 고문서 내의 관례 실태

Ⅲ. 관례의 다양한 실제 사례

Ⅳ. 근대 전환기의 관례 동향

Ⅴ.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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