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선학들은 정관 11년(869)에 일어난 신라해적 사건이 개방적이었던 일본의 대외인식이 배타적・폐쇄적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관련 사료를 검토한 결과, 신라해적 사건이 9세기 후반 일본의 대외인식이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고대 일본의 대외인식은 보편적으로 사용된 부정관념의 일종인 예가 특수한 관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9세기 전반 일본 사회에 역사성을 갖게 된 예 관념이 재정립됨에 따라 일본의 내・외를 청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려는 이분법적인 인식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러한 변화가 일본의 대외인식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9세기 전반에 재정립된 예 관념은 사가조에 ‘이동하지 않는 천황’, ‘보이지 않는 천황’이라는 새로운 천황상을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관 11년(869)에 발생한 신라해적 사건은 이러한 인식 변화에 따른 결과였지 결코 계기는 될 수 없다. 헤이안 시대 이국에 대한 인식이 폐쇄적・배타적으로 전환된 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코스몰로지의 변화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The previous researchers have assumed that the impact of the Silla’s pirate case caused in 896 drove Japanese society lost its diplomatic openness. However, I cannot accept the causality between the transformation of Japan’s posture and this case. In the former half of the 9th century, the cosmology which divided the entire Japan’s territory into two parts; pure and impure had formed. The process of its formation synchronized with the process the new emperor’s image, “inactive” and “hidden”, had formed during the emperor Saga’s reign. The Silla’s pirate case was therefore not cue but outcome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recognition. This paper demonstrates the necessity making clear the background of the transformation of Japan’s recognition on foreign countrie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hange of the cosmology.
Ⅰ. 머리말
Ⅱ. 정관(貞觀) 11년(869) 신라해적 사건의 의미
Ⅲ. 9세기 전반 예(穢) 관념의 형성
Ⅳ. 천황상(天皇像)의 변화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