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재효 개작사설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속성을 그의 개작동기를 재설정함으로써 해명하고자 하였다. 1877년부터 1880년 인근 고을 향리가 신재효에게 보낸 편지 및 이 즈음 신재효의 재산 상황을 보면, 그는 단순히 판소리를 애호하여 후원한 것이 아니라 않고 판소리 연행의 기획자이자 중개자로 활동한 듯하다. 그렇다면 신재효 사설의 이질적인 면은 당대에 대가를 지불하고 판소리를 감상하던 다양한 향유층의 취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재효는 양반에서부터 군교 및 향리, 요호부민까지 각각의 향유층이 선호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이들의 취향에 부합되는 사설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그 중 <춘향가>는 모든 계층에서 인기를 끌었기에 취향에 따라 판소리 광대의 <남창춘향가>와 창동(唱童)의 <동창춘향가>로 나누어 개작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신재효의 모든 개작 사설에서 두루 나타나는 성적인 묘사는 당대 판소리를 향유하던 남성 향유층의 취향에 맞춘 것으로 보이지만, <변강쇠가>에 나타난 기괴미는 하급무사 및 군교 등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Sin Jae-Hyo remade six pansori works; however, we find that there is a lack of consistency in the remade versions. Namchang-Chunhyangga caters to the tastes of the nobility, whereas Byeongangsoega is too obscene and vulgar for the nobility to appreciate. I think it came from Sin’s attributes as a pansori agent; his remade versions adapted to each group of spectators, from the low-ranking officers to the nobles and the rich who could pay for pansori. All Sin’s versions have sexually charged scenes, which are for the male spectators of pansori. However, the grotesque scenes in Byeongangsoega are supposed to have been adapted for low-ranking officers.
1. 서론
2. 19세기 지방의 판소리 연행과 신재효의 역할
3. 사설개작의 동인에 대한 추정
4. 개작사설과 향유층의 취향
5.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