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월 31일 판소리 보유자와 연구자・애호가가 판소리 정립 및 명맥보존을 목적으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했다. 판소리보존연구회 설립을 주도한 유기룡은 기념공연 개최를 제안했고, 이보형은 이 공연을 ‘명창 권삼득 탄생200주년 기념공연’으로 기획했으며, 유기룡은 여기에 ‘판소리유파발표회’라는, ‘유파’를 전면에 내건 이름을 붙였다. 판소리유파발표회 초기인 제1회~제3회(1971~1973)에 나타나는 유파 인식에서 강조된 것은 악조 개념으로서의 ‘제’였다. 제4회~제6회(1974~1976)에 이르러서는 행사명을 ‘판소리고조연구발표회’, ‘판소리고조유파발표회’로 바꾸었는데, 여기에 ‘고조’와 옛 더늠을 강조하는 유파 인식이 드러나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공연 내용으로까지 반영되지 못했다. 제7회~제9회(1977~1979)는 유파 개념안에서 바탕소리와 제(악조)를 연결하는 시도를 통해 유파 전승의 갈래를 다양화했다. 제9회~제17회(1980~1987)는 판소리 ‘유파’ ‘발표회’라는 행사명을 무색하게 하는 내용으로, 유파 인식의 측면에서도 깊이 있는 고민을 보여주지 못했다. 제18회~제22회(1988~1992)에 이르러 판소리유파발표회는 유파 개념으로서의‘제’를 강조하며, 문화재 지정 바디 위주의 판소리 전승 문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유파 인식의 측면에서는, 제23회~제44회(1993~2014)도전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제’, ‘판’, ‘류’와 같은 용어가 혼용되고, 단선적인 전승 계보가 전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제45회~제50회(2015~2020)는 창작판소리, 창극, 여성국극, 영어 판소리 등 전승오가의 경계에 있거나, 그 경계를초월한 레퍼토리를 정식으로 포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추동해온 요인은 바로 무형문화재 제도였다. 단일 종목으로서의 판소리가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이 되고, 전승오가의 보유자가 바탕별로 확보되는 동안 판소리연구보존회는 제1회~제8회(1971~1979) 판소리유파발표회를 통해 단일하지 않았던 유파 개념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불완전하나마 나름의 방향을 잡고 유파 개념을 정립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강조된 것은‘고조(古調)’와 원형이었으며, 이는 원형 보존에 주안점을 두었던 무형문화재제도의 성격과도 맞물린다. 다만 이 시기에는 보유자 및 그 제자들이 기존에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디 외에 다른 소리도 비교적 자유롭게 발표하는 분위기였다. 다음 제9회~제44회(1977~2014) 발표회가 진행된 시기에는 중앙의 국가무형문화재는 물론 지방의 시・도무형문화재의 판소리 종목 보유자 인정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판소리유파발표회와 무형문화재 제도 간 관계가 더욱 긴밀하게 작동하게 되었다. 유파 인식의 측면에서도 판소리 전승 주체의 관점에서나름의 방향성을 정립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에 문화재로 지정된 유파와 ‘제’ 인식을 단순 수용하고 강화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판소리유파발표회에서의‘유파’는 점차 문화재 지정 바디로서의 ‘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서제45회~제50회(2015~2020)를 구분한 것은, 무형문화재 제도에 ‘원형’ 대신 도입된 ‘전형’ 개념과 그로 인한 영향 때문이다. ‘유파’를 행사명 전면에 내건 판소리유파대제전(전 판소리유파발표회)에서, 창작판소리, 창극, 여성국극, 영어 판소리, 순우리말 판소리 등 전승오가의 경계에 있거나 그 경계를 넘어서는 레퍼토리를 초청 공연이 아닌 본 공연으로 포괄한 것은 분명 전과 달라진 판소리 인식을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판소리 ‘유파’의 전승 범주도 전통판소리 또는 전승오가의 영역 그 너머로 확장될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held by the Pansori Conservation Research Association 50 times between 1971 and 2020, examining the background of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and the perception of the Pansori School. After dividing the transition patterns into seven periods and considering them in detail, we find that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ystem was a factor that drove changes in the perception of the school in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On January 31, 1970, pansori holders, researchers, and lovers founded the Pansori Conservation Research Association with the aim of preserving the art and reputation of pansori. Yoo Ki-ryong, who led the establishment of the group, proposed that a commemorative performance be held. Lee Bo-hyung planned the performance for the 2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master singer Kwon Sam-deuk, and Yoo Ki-ryong named it Pansori School. The school as it appeared in the 1st-3rd presentations (1971-1973), which represent its early stage, emphasized “je” as the concept of the musical style. In the 4th-6th presentations (1974-1976), the name of the event was changed to Pansori Gojo Research Conference and Pansori Gojo School Presentation. However, this was not reflected in the actual contents of the performance. In the 7th-9th events (1977-1979), the branch of tradition was diversified through an attempt to connect the Batangsori and the “je” (musical style) within the concept of the school. In the 9th-17th presentations (1980-1987), the content overshadowed the name of the event: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did not show a deep concern for the perception of the school. From the 18th to the 22nd events (1988 to 1992),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emphasized “je” as a school concept and moved toward strengthening the pansori tradition centered on the Badi, which was designated as cultural property. In terms of school recognition, the 23rd-44th presentations (1993-2014) did not significantly differ from those of the previous period, but the use of terms such as “je,” “pan,” and “ryu” was mixed and a unilinear lineage of transmission was increasingly emphasized. The 45th-50th presentations (2015-2020) formally included repertoires that were on or beyond the boundaries of the Five Major Versions, such as creative pansori, changgeuk, Yeoseonggukgeuk, and English pansori.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ystem was the main factor driving these changes. While pansori as a single event became a designated intangible cultural asset and the holder of the Five Major Versions was secured for each Batangsori, the Pansori Conservation Research Association presented the concepts of non-single waves and waves in their own directions. In the process, emphasis was placed on the “Gojo” (old style) and the original form. This coincid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ystem, which focused on preserving the original form. However, during this period, holders and their disciples were relatively free to announce additional Badi, which had previously been designated as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At the time of the 9th-44th presentations, the pansori event holder was continuously recognized not only for the central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but also the local city and provincial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a gap emerged between the Pansori School Presentation and the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system. The relationship then became increasingly close. In terms of the perception of the school, rather than trying to establish its own directio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ubject of pansori transmission, it merely accepted and emphasized the school and “je,” which had been designated as cultural assets. In this way, “school” in the Pa
1. 머리말
2. 판소리보존연구회 설립에 따른 판소리유파발표회 창설
3. 판소리유파발표회에 나타난 유파 인식의 변천
4. 맺음말: 판소리유파발표회의 유파 인식에 미친 무형문화재 제도의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