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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논총 제84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하계마을 이만규가의 ‘혼례홀기’ 연구

A Study on ‘Honryeholgi’ of Lee Man-gyu's family in Hagye Village

DOI : 10.15186/ikc.2023.8.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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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유천(柳川) 이만규가(李晩煃家)의 ‘혼례홀기(婚禮笏記)’가 하계마을에서 어떻게 시행되고 계승되었는지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먼저 하계마을에서 혼례를 올리기 전 ‘혼례를 전제로 하는 관례’의 시행을 살펴보고, 이만규가에 전해진 ‘혼례홀기’가 하계마을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시행되었는지『향산집』과 『향산일기』, 『유천집』, 유천가에 전해지는 문서,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계마을은 이황의 후손이 400여년을 살아오면서 이황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간 곳이다. ‘혼례홀기’에는 신랑과 신부의 서는 위치를 ‘서서위동향립(壻西位東向立), 부동위서향립(婦東位西向立)’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신랑이 서쪽에 서고, 신부가 동쪽에 서는 ‘서서부동(壻西婦東)’ 을 말한다. 『성리대전』 「가례」에 기록된 혼례의 동뢰연에서 신랑과 신부의 위치인 ‘서동부서(壻東婦西)’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황이 활동한 시기인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은 성리학적 사회관습이 수용되면서 사회 구조가 변화하는 시기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주희의 『가례』에 입각한 각종 예제가 사족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정착된 시기였다. 이황은 아들 이준에게 손자 안도가 관례를 올렸다는 것을 서신으로 알렸다. 이 시기에 유자(儒者)들은 주자의 『가례』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15~20세에 관례를올린 다음 스승의 문하로 나아가 1년 이상, 혹은 평균 3년 이상 학문을 연마한다음 혼례를 거행한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시행된 관례는 독립된 의례가 아닌 혼례의준비 과정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입지를 위한 관례’로서의 독자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관례의 의미가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과 문서, 그리고 문집과 구술 자료를 통해 1810년경부터 1960년대까지 하계마을에서 ‘혼례를 전제로 하는 관례’를 올린 세대는 50세대 가운데 12세대, 14회였다. 하계마을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의 손자 안도에 이어 1960년대까지정혼을 한 다음 관례를 올리는 전통을 이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휘연의 관례(1810년 추정)로 부터 이동후의 관례(1962년)는 19세기에서20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시기에 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인 수난을 겪으면서 신분제 사회의 변동과 함께 유교적 전통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하계마을에서 근대화·산업화·도시화라는 사회적 격변기에도불구하고 ‘혼례를 전제로 하는 관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는데 의의가있다. 구술자의 기억에 의하면 하계마을에서는 1955년에서 1962년까지 전통혼례를 올린 세대는 50세대 가운데 17세대이고 그 가운데 이만규가 ‘혼례홀기’ 를 사용한 경우는 7세대 12회였다. 이만규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혼례홀기’를빌려서 창홀을 하였다고 한다. 1962년까지 조사된 것은 그 당시 유행하던 신식결혼식으로 인해 마을에서전통혼례가 예식장 혼례로 바뀌었고 1976년 안동댐 수몰로 인해 마을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만규의 현손인 이동후는 혼례를 올리기 한달 전 관례를올리고 영주에 사는 봉화 금정자와 혼인하였다. 이날 이만규가 ‘혼례홀기’를사용하였다. 『도산전서』에 기록된 ‘혼례홀기’는 이안도와 이야순이 남긴 기록처럼 선조의 뜻에 따라 이만규가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현손 이동후를 통해이어지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the 'Hongryeholgi’ of the Yucheon Lee Man-gyu family was implemented and inherited in Hagye Village. First of all, we looked at the implementation of the ‘Gwallye on the premise of marriage’ before holding a wedding ceremony in Hagye Village and We looked at how the “Hongryeholgi” handed down to Lee Man-gyu family was inherited and implemented in Hagye Village, focusing on “Hyangsanjip”, “Hyangsan Ilgi”, “Yucheonjip”, and documents and oral materials handed down to Lee Man-gyu family. Hagye Village is the most typical place where Yi Hwang's descendants have inherited and developed Yi Hwang's studies for 400 years. In <Hongryeholgi>, which is included in 『Dosanjeonseo』, the standing position of a bride and a groom in a wedding ceremony was stated as seoseowi-donghyang’rip (壻西位東向立) and budong’wi-seohyang’rip (婦 東位西向立). Such arrangements indicate seoseo-budong (壻西婦東), where the groom stands to the west and the bride stands to the east. These positions differ from the positions of a bride and a groom in dongroe’yeon (seodong-buseo (壻東婦西)) recorded in Garye of Seongri-daejeon. From the late 16th century to the early 17th century, the era when Lee Hwang actively developed his scholarship, the social structure was being transformed with the acceptance of Neo-Confucian social customs. In particular, various ceremonies based on Zhu Xi's Garye were quickly being accommodated primarily by aristocrats during this period. Lee Hwang informed his son Lee Jun by a letter that his grandson An-do celebrated the coming-of-age ceremony (gwanrye). During this period, Confucian scholars, a s expressed in Zhu Xi's 『Garye』, held a ceremony at the age of 15 to 20, then went to the teacher's school and studied for more than one year, or more than three years on average, and then held a wedding ceremony. The customs implemented from the mid-18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tend to be reduced to the preparation process for the wedding rather than an independent ceremony. This can be seen as a weakening of the meaning of Gwanrye that had an independent status as 'Gwallye for a position'. According to records and documents, as well as anthologies and oral data, from around 1810 to the 1960s, 12 out of 50 households, 14 generations, raised the ‘Gwallye on the premise of marriage’ in Hagye Village.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descendants of Lee Hwang of Hagye Village continued the tradition of betrothal marriage followed by Lee Hwang's grandson Ando until the 1960s. The period from Lee Hui-yeon's Gwanrye (estimated in 1810) to Lee Dong-hu's Gwanrye (1962) corresponds to the period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is period was a time when Confucian traditional society was disbanded along with changes in the status system society during the national hardship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espite major changes in modernization,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it is meaningful that the tradition of “conventional practice on the premise of marriage” has been continued in summer villages. According to the narrator's memory, among the 50 generations in Hagye Village, 17 generations had traditional weddings from 1955 to 1962, and among them, 'Hongryeholgi ' 12 times in 7 generations. It is said that the window hall was borrowed from the ‘Hongryeholgi’ owned by the Lee Man-gyu family. The investigation until 1962 is because the traditional wedding ceremony in the village changed to a wedding ceremony in the wedding hall due to the new wedding ceremony that was popular at the time, and the village was disbanded due to the submersion of the Andong Dam in 1976. Lee Man-gyu's great-great-grandson, Lee Dong-hu, held gwanrye a month before the wedding ceremony and married Bonghwa

Ⅰ. 머리말

Ⅱ. 하계마을 관례와 혼례

Ⅲ. 이만규가의 ‘혼례홀기’ 계승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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