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문장가였고, 아찬(阿飡)의 벼슬을 얻은 정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2세 때 당(唐)으로 유학을 떠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고 황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토평의 책임자였던 고변(高騈)의 선택을 받아 종사관에 임명되어 고변(高騈)의 공문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저술하여 도통순관성무시랑시어사내공봉(都統巡官承務侍郞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그 후 4년간 고변을 대신하여 산문집(表·狀·啓·書·檄文)을 많이 지었는데, 그 수량이 만 점에 이르렀으니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은 후 고국으로 돌아왔고 시독 겸 한림학사(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의 벼슬을 받고, 당에서 활동할 때 쓴 모든 산문과 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六頭品으로서의 신분적 한계와 국내파 출신들의 시기와 의심으로 인해 外職으로 물러나게 되고, 결국 40을 약간 넘긴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悠悠自適한 삶을 살게 된다. 그가 남긴 필적 중에 현재 검정된 것이 쌍계사 진감선사비(雙谿寺眞鑑禪師碑)이고 이 비석은 전액(篆額)을 포함하여 약간의 금이 가기는 하지만 형태가 좋고 완벽하기 때문에 최치원의 서예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작품이다. 이 비석을 중심으로 최치원의 서예를 분석하고, 이 비석을 비교하면서 최치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다른 작품들을 분석해 보고 또한 통일신라의 서예와 중국 서예의 수용과 특징을 확인한 후 그의 서예와의 영향 관계를 확인해 보았다. 우선 최치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를 집필한 인물과 작품 분석을 통해 최치원과의 관계를 확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서예는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까지 연결되면서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Gowoon Choi Chi-won was a person who made active in the end of United Shilla. He was a good writer as regards prose and poetry and well known as politician to have gotten government post of A-chan(阿飡). He went abroad to Dang to study when he was a 12 years old, one of chinese ancient countries, and passed examinations of Binkongkwa(賓貢科). When rebellion of hwang-so happened, he made a selection by Go-byung(高騈), a responsible person of Go-pyung(高騈) and was appointed as Samookwan(事務官), began to take charges for making official letter on behalf of Go-byung(高騈). After that time, he made write of Tohwangsogyuk(討黃巢檄) and appointed as Dotongsunkwan-sungmusirang-siyeosanaegongbong(都統巡官承務侍郞侍御史內供奉), received Jagumyeodae(紫金魚袋). Choi Chi-woon wrote lots of prose and poetry (表·狀·啓·書·檄文) for 4 years after that on behalf of Go-byung, the quantities came to 10,000 pieces of work. So, we can make assume of his excellent writing ability and power. After he got good reputations like this he returned to his country. He received government of Si-dok(侍讀)&Hwanrimhwaksa(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 and began to arrange all prose and poetry which he had wrote when had made active in dang. As the result of that, Sasigungchebu(私試今體賦), 1 set (5 pieces), Geiwoonphilgyung(桂苑筆耕) 1 set (100 pieces), Geiwoonphilgyungjib(桂苑筆耕集) 1 set (20 pieces) totally, 28 volumes are reported to king after making arrangements of them. Out of them, “Geiwoonphilgyungjib(桂苑筆耕集)” is taking an important position as best anthology in chinese classical literature history which handed down today. He went and moved to local office post due to jealousy and doubt from domestic study party while he continues official post. After all he retired from all the official posts when his age was over 40 a little and began to enjoy free life. The identified work by today out of works which he remained is Ssanggeisa-Jingamseonsabi(雙谿寺眞鑑禪師碑). This monument is very important work piece, understanding calligraphy of Choi Chi-won because it keeps good and perfect shape including Jeonaek(篆額) in spite that there are some cracks.
Ⅰ. 당(唐) 서예의 수용
Ⅱ. 통일신라시대 서예
Ⅲ. 고운 최치원의 서예
Ⅳ. 최치원의 서예사적 의의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