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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15세기 초 朝日交涉에서 九州探題의 역할과 위상

The Role and Status of the KyushuTandai in the Joseon-Japanese Relations in the Early 15th Century

DOI : 10.24939/KJH.2023.1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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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는 태종대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는 명과 조선의 강력한 해금정책과 더불어 일본이 남북조의 항전을 끝내고 무로마치 막부 중심의 안정된 정치권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대 쇼군 요시모치는 이를 정면으로 뒤집었고 명과 외교 및 무역을 중단하였다. 서서히 막부의 통제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왜구가 발생했고 명의 일본 정벌을 걱정한 조선은 기해동정이라는 대규모 원정으로 왜구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한편 기해동정에 놀란 일본의 막부와 규슈세력은 이를 명과 조선에 의한 대규모 침입의 전초전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종의 즉위 축하를 명목으로 온 쇼군의 사신은 기해동정에 대해 문의하였고, 조선은 이들에게 회례사를 보내어 조선이나 명이 일본 본토나 규슈를 침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시켜주려 하였다. 양국 사신의 교섭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중재한 것은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였다. 시부카와 미츠요리와 요시토시 부자는 적극적으로 쇼군과 조선을 중재하였고 그를 따르는 하카타의 승려와 상인들 역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기해동정 이후 조선과 규슈탄다이와의 교섭은 매우 늘어났다. 조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규슈탄다이를 통한 대일외교의 일원화를 추진하였으며 실제로 많은 규슈의 세력들이 독자적 사신 대신 규슈탄다이의 사신과 함께 조선에 도래하였다. 기해동정을 통해 왜구의 침략을 중단시킨 조선은 규슈탄다이를 통해 막부 및 규슈의 제세력과 통교하는 조일외교의 재편을 도모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428년에 시부카와씨는 하카타를 잃고 작은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막부의 정책도 시부카와 부자를 소환하고 오우치씨를 통한 간접 통치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조선 또한 규슈탄다이를 통한 조일통교의 재편이 좌절되었다. 대신 당시 쓰시마 일대를 장악한 대마도주를 통한 통교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이상의 내용은 기해동정 이후 조선이 막부와 교섭하며 복잡한 대일외교를 최대한 단순화하려 했던 흔적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지역의 각 세력들이 제각기 조선과 통교관계를 맺었고 그에 따라 이를 일원화하는 것은 조선전기 南邊을 안정화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많은 점이 밝혀졌으나 공백으로 남아 있는 막부와의 교섭, 그리고 규슈탄다이라는 세력의 특수성은 어느 정도 밝혔다고 생각한다.

Waegu, which plagued Joseon in the 14th and 15th centuries, decreased considerably as it entered the Taejong period. This is because, along with the strong lifting policy of Ming and Joseon, Japan ended the resistance of the North and South dynasties and formed a stable political power centered on the Muromachi shogunate. However, Yoshimachi, the fourth Shogun, reversed it head-on and suspended diplomacy and trade with Ming. At a time when the control of the shogunate gradually faltered, a large-scale Japanese pirates centered on Tsushima occurred, and Joseon, worried about Japan's conquest, tried to suppress the Japanese pirates with a large-scale Tsushima conquest. Meanwhile, Japan's Shogun and Kyushu forces, surprised , considered this a prelude to a massive invasion by Ming and Joseon. The envoy of Shogun, who came to celebrate King Sejong's accession, inquired about the Gihae Dongjeong, and Joseon sent an envoy to them to show that Joseon or Ming did not intend to invade Japan. It was KyushuTandai Shibukawa who actively mediated in the negotiation process between the two envoys. The Shibukawa Mitsuyori and Yoshitoshi father and son actively mediated the Shogun and Joseon. As a result, negotiations between Joseon and Kyushu-Tandai increased significantly after the Gihae Dongjeong. Joseon did not stop there, but promoted the unification of diplomatic windows to Japan through Kyushu Tandai. However, in 1428, Shibukawa lost Hakata and was reduced to a small force. The shogunate's policy was also changed to summon the Shibukawa father and son and indirect rule through Ouchi. As a result, the reorganization of Joseon's bargaining channel was also frustrated. Instead, unification of diplomatic relations was achieved through Tsushima. The above is a trace of Joseon's attempt to simplify complicated diplomacy with Japan as much as possible by negotiating with the shogunate after the conquest of Tsushima.

Ⅰ. 머리말

Ⅱ. ‘기해동정(己亥東征)’과 조일관계의 변화

Ⅲ. 전후 조일교섭과 규슈탄다이의 역할

Ⅳ. 규슈탄다이의 약화와 対馬島主로의 교섭 창구 일원화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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