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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 節義論의 전개 양상

A Study on the Development Aspect of the Theory of the Fidelity in Joseon Dynasty

조선은 개국과 왕위 다툼·사화·전쟁 등을 겪으면서 節義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때때로 자각하였다. 조선 전기에 절의를 규정하고 정리한 대표적 인물은 崔溥이다. 그는 史論인 「新羅節義」에서 국가의 흥망과 원인을 궁구하고 기술하는 역사가의 관점을 적용하여 ‘절의’가 국가의 흥망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이황과 같은 성리학자가 절의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근본적 考究를 하였으니, 그 직접적 요인은 『朱子語錄』 탐독에 있다. 주자가 후한 시대 절의의 문제점을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절의에 관한 의식의 전형은 羅世纘의 「崇節義論」과 權好文의 「節義天下之大閑」에서 볼 수 있다. 다만 「崇節義論」은 왕에게 보이기 위해 지은 글이므로 논지의 전개가 한정적이며, 절의가 천성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왕이 솔선하여 숭상하고 포양하여 불시에 쓸 수 있도록 대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다소 혼란스럽고 모순된 점이 있다. 「節義天下之大閑」은 賦라는 형식을 채용하였기에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절의의 윤리적 가치와 정치적 효용의 상관성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였다. 조선 중기의 지식인들은 이전 시기에 경험한 端宗의 축출과 점철된 士禍로 인해 신념과 처세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전 시기의 막연했던 절의에 관한 견해가 이론화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절의론의 향배는 士禍 및 黨爭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대표적 사례는 중종 때, 이전 기묘사화의 무고를 바로잡고 희생자를 伸冤하는 과정에서 절의론이 거론된 것이다. 조선의 절의론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鄭介淸의 절의론을 둘러싼 사건이다.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로 기축옥사를 처결하던 鄭澈 등으로부터 ‘排節義論’을 작성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그의 절의론은 원제목인 「東漢節義晉宋淸談說」보다 ‘排節義論’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면서 사후에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조선 후기 절의론의 향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金壽恒이다. 김수항은 安邦俊이 주장하는 ‘절의’란 무엇인지 반문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주장을 전개하였다. 첫째,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옳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모두 그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은거’와 ‘절의’를 유사 개념으로 생각하던 전통적·일반적 절의 개념과 차별성을 보인다. 둘째, ‘尊周나 復讐도 義의 범주에 들어갈 뿐 아니라, 존주나 복수를 능가하는 절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 집권층의 이데올로기로 형성된 것이다. 셋째, 절의와 학문은 분리해서 논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조선 후기에는 절의가 원론적 차원을 탈피해 사회적·현실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현상이 보인다. 그러한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 史家 李種徽의 절의론이다. 이종휘는 조선의 고유한 풍속이자 절의로 4가지 조목을 제시하였으니, 첫 번째는 士族과 백성의 구별, 두 번째는 중과 俗人의 구별, 세 번째는 종과 주인의 구분, 네 번째는 아녀자의 수절이다. 이 4가지 조목은 양반 중심의 사회를 재정비하고 강화하자는 논리이다. 이종휘의 절의론은 조선 후기 양반의 위기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전 시기의 단선적 절의 개념과 달리 당면한 사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Joseon Dynasty sometimes realized the importance of the value of fidelity as it experienced the founding of the nation, struggles for the throne, sahwa[literati purge], and wa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epresentative figure who defined and organized fidelity was Choi Bu(崔溥). In his historical opinion, 「the Fidelity of Silla(新羅節義)」, he asserted that ‘fidelity’ is most closely related to the rise and fall of the country from the perspective of a historian who investigates and describes the rise and fall of the country and its causes.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Confucian scholar such as Lee Hwang made fundamental investigation on the value and utility of fidelity, and the cause was in reading extensively of 『the Analects of Zhu Xi(朱子語錄)』. This was because Zhu Xi mentioned the problems of fidelity during the Later Han Dynasty. A typical example of awareness about fidelity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can be seen in Na Se-chan(羅世纘)’s 「Sungjeoluilon(崇節義論)」 and Kwon Ho-mun(權好文)’s 「Jeoluicheonhajidaehan(節義天下之大閑)」. However, since 「Sungjeoluilon」 was a text addressed to the king, the development of the argument was limited. And while it claimed that fidelity is inherent in human nature, the logic that the king should take the initiative to reverence and exalt it and prepare for it to be used at an unexpected time is somewhat confusing and contradictory. Although there was limitation in developing the logic in an orderly manner because 「Jeoluicheonhajidaehan」 adopted the form of Bu[賦, Ode], it organizationally structured the correlationship between the ethical value and political utility of fidelity. Intellectuals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had no choice but to feel a sense of disconnect between their beliefs and their worldly wisdom due to the expulsion of King Danjong(端宗) which they experienced in the previous period and the widespread sahwa[literati purge] at the time. Accordingly, the vague view about fidelity in the previous period was theorized. From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late Joseon Dynasty, the trend of the theory of fidelity was closely related to sahwa[literati purge] and interparty strife. A representative example was that the theory of fidelity was mentioned in the process of correcting the false accusations of the previous Gimyosahwa(己卯士禍) and acquitting the victims,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中宗). The most dramatic thing about the theory of fidelity in Joseon Dynasty was the incident surrounding the theory of fidelity of Jung Gae-cheong(鄭介淸). Jung Gae-cheong was criticized by Jung Cheol(鄭澈) and others, who were executing GichukOksa(己丑獄事) as the leader of Seoin, for writing the ‘Baejeoluilon(排節義論)’, and he died due to involvement in Jung Yeorip(鄭汝立)’s rebellion. His theory of fidelity became controversial for a long time even after his death, as it was handed down under the name ‘Baejeoluilon(排節義論)’ rather than its original title 「Donghanjeoluijinsongcheongdamseol(東漢節義晉宋淸談說)」. The person who clearly had showed the trend of the theory of fidel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Kim Su-hang(金壽恒). Kim Su-hang developed three arguments in the process of questioning what ‘fidelity’ advocated by An Bang-jun(安邦俊) was. First, it was said that ‘all not holding a government service is right and not all entering into government service is wrong’, showing a difference from the traditional and general concept of fidelity which ‘retirement’ and ‘fidelity’ were considered similar concepts. Second, ‘Not only do reverence to Zhou Dynasty[尊周] and revenge[復讐] fall into the category of righteousness(義), but there is no fidelity that surpasses reverence to Zhou Dynasty and revenge’. This consciousness was formed by the ideology of the ruling class in the l

1. 문제의 제기

2. 조선 전기 역사가의 단선적 절의론

3. 조선 중기 절의의 가치와 효용에 관한 논리

4. 조선 중기 절의의 弊害에 관한 논의와 筆禍

5. 조선 후기 이데올로기와 절의론

6. 조선 후기 역사가의 차별적 절의론

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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