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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기획연구] 국권장악 책략으로서의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정책 연구(1937-1949)

A Study on the United Front Policy of the CCP as a means of Seizing State Power (1937-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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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이후 1939년 중국 대륙의 정권을 획득할 때까지 중공은 국내외적인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통일전선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 서안 사변과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1937 년 9월 형성된 제2차 국공합작은 국민당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거의 궤멸직전까지 이르렀던 중공이 세력을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국민당과의 관계는 초기 1여년간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1938년 말 이후 악화되어 1941년 1월 환남사변 (통칭 新四軍 사건)을 계기로 국공합작은 사실상 거의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국공간의 관계 악화는 중공이 일치항일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 적으로는 일본과의 전쟁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더 치중하였고, 이를 경계하게 된 국민당이 중공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견제한 결과였다. 일본의 패색 이 짙어가던 항일전 말기, 악화된 국공관계를 해소하려는 협상이 미국이나 군소 정당들의 중재로 계속되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1946 년 국공내전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제2차 국공합작은 완전 붕괴되었다. 한편, 중공은 국공 관계가 악 화되었던 시기나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를 막론하고 국내외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통일전선 전략과 전술을 일관되게 발전시키고 실천해 왔다. 그 결과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내전 승리와 정권 획득에 성공 하였던 것이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중공이 발전시킨 통일전선의 기본 사상과 방침은 1940년을 전후하여 이론적으로 확립되었다 통전의 기본 사상은 중공이 자주성과 독립 성 및 영도권을 확보한 계급동맹의 확대였다 .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 통전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으로 제시한 것이 “기본세력을 발전시키고, 중간세력을 쟁취하며, 완고파를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 . 이 시기에 모택동은 중국 혁명의 현 단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인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주장하고, 이 신민주주의」 단계에서 필요한 중공의 과제가 바로 통일전선의 성공적인 수행임을 강조함으로써, 통일전선의 사상과 방침은 보다 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이론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항일전 말기에 이르면, 모택동과 중공은 적극적으로 「연합정부론」을 주장하였다. 이 연합정부 구상은 국민당의 영도권을 일부 인정하되 독재권은 부정하고, 국민당과 중공 그리고 각당 각파가 참여하는 「민주적 연합정부」를 구성하자는 안(案)이었다. 이것이 제3의 정치세력과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열세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 결과적으로 국민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중공의 통일전선 전략의 일환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통일전선의 유용성을 간파한 중공은 국공 내전 기간에도 이를 계속 적용하였다. 국통구 (國統區) 내 인민의 각계 각층에 침투하여 반미, 반국민 정서를 자극허여 “광범한 애국민주운동”을 일으키고, 국민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해 이탈된 지식인과 민족자본가 등 소위 중간계층을 대량으로 포섭함으로써 대중적 자지를 확보하게 된 중공은 내전 초기의 군사적 열세에 도 불구하고, 마침내 내전의 승리와 정권 획득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Ⅰ. 서론

Ⅱ. 항일전쟁시기 중공의 통일전선정책

Ⅲ. 항일전쟁 승리후의 통일전선정책

Ⅳ. 국공내전기 중공의 통일전선 책략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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