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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8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1910년대 일본의 재만 조선인 회유와 유교 지도자의 귀국

1910년대 말~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 발견되는 유교운동의 역동성은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취해진 국내 세력의 신속한 대응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만 유교 지도자의 귀국이 불러온 결과이기도 했다. 이들은귀국 직후 보수적인 유교지식인들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고, 새로운 유교단체를 설립함으로써 침체되어 있던 유교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재만 유교 지도자의 귀국은 일본 정부의 회유정책과 밀접한 관계가있었다. 1918년 8월 일본의 대륙 낭인 스에나가 미사오(末永節)와 재만 친일파유력자 장우근은 「국외 조선인 회유 · 통일에 관한 의견」을 작성해 일본 정부에관광단(시찰단) 운영을 통한 재만 조선인 지도자 회유를 제안했다. 실제로 1919~ 1920년 여순 · 대련 관광단에 참여했거나 일본 정부와 긴밀하게 접촉했던 유교 지도자 맹보순·이상규·정안립 등이 귀국했고, 이들은 1920년대 유교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The dynamics of Korean Confucian movement found in colonial Korea in the late 1910s and early 1920s were the result of the rapid response of domestic confucian intellectual groups to domestic and international situations, but it was also the result of the return of the Confucian leaders. After returning home, they revitalized the Confucian community by urging the conservative Confucian intellectuals to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leading the establishment of Confucian organizations. The return of the Confucian leaders was closely related to the Japanese government’s conciliatory policy. In August 1918, Suenaga Misao, a ronin of Japan, and Jang Woo-geun, a pro-Japanese Korean, wrote ‘an opinion on the conciliation and unification of Koreans abroad’ together and proposed a conciliation for Korean leaders in Manchuria, China, through observation groups. In fact, between 1919 and 1920, Maeng Bo-soon, Lee Sang-gyu, and Jeong An-rip, who had participated in the Observation Group to Yeosun and Dalian or had often met with Japanese officials and exchanged opinions, returned home, and became a new leading group of the Confucian movement in 1920s.

1. 머리말

2. 스에나가 미사오와 장우근의 재만 조선인 회유 복안

3. 장우근의 도일 교섭과 일본 정부의 반응

4. 일본의 여순 · 대련 관광단 운영과 유교 지도자의 귀국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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