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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1930년대 말 국민체력저하 문제의 대두와 사회적 대응

1936년에 육군대신 데라우치 히사이치가 정례 각의에서 국민체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지적했다. 해당 발언은 이후 1938년 후생성 창설로 이어졌다. 육군에서 국민체력저하 현상을 시급한 문제로 인식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육군은 이전부터 징병검사 성적을 지속적으로 분석해왔다. 1934년에 아사히 신문사에서 시행한 ‘우량장정시정촌표창’ 사업에서 징병검사 결과를 활용한 경험, 그리고 고이즈미 치카히코(이후 후생대신)가 의무국장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장정체력문제를 재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고이즈미가 사회적 요소와 함께 분석한 국민체력저하 문제가 육군대신의 발언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후 학술연구, 대중미디어 등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먼저 일본학술진흥회에서 관련 위원회를 설치하여 과학적인 검토에 착수했다. 연구 결과, 국민의 체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학술연구 결과는 ‘체력'에 대한 정책적인 정의를 마련했고, 나아가 1940년에 제정되는 국민체력법의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 대중미디어인 아사히 신문사는 국민체력 문제가 사회 내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1937년 6월의 ‘국민체력향상 좌담회'가 주목된다. 여기에는 정부관료를 비롯하여 대학, 노동계, 체육계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석하여 국민체력 저하의 원인, 향상책 등을 논의하였다. 정책적 관점뿐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의 문제점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좌담회가 뚜렷한 해결방안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참석자들이 이후에도 국민체력에 관한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좌담회에서의 논의 내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재생산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계기로 국민체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논의와 인식 확산 과정은 이후 정책화 과정에서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해, 전시기에 후생성 창설로 상징되는 국민체력문제의 국가적 중요성은 정치적 대응뿐 아니라 사회적 방면에서의 관심과 인식이 맞물리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In 1936, General Teraiichi Derauchi raised concerns about the declining national physical fitness during a regular assembly. This statement paved the way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Welfare Department in 1938. The recognition of the national physical fitness decline as an urgent issue by the army emerged around the mid-1930s. The army had been continuously analyzing the results of conscription examinations. Experiences utilizing the results of conscription examinations in the “Excellent Excellent young man Village Award(優良壯丁市町村表彰)” project conducted by the Asahi Shimbun in 1934, along with the appointment of Chikahiko Koizumi(小泉親彦) as the Director of the Medical Officer, prompted a re-evaluation of the physical fitness issue among servicemen. Subsequently, Koizumi's analysis of the national physical fitness issue led to General Koizumi's remarks. Subsequently, through academic research and mass media, the issue spread socially. Initially, the “Jap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日本學術振興會)” established a related committee to initiate scientific examination. The research findings highlighted the necessity for accurate data to assess the nation's physical fitness. These academic research results provided a policy definition for 'physical fitness' and laid the groundwork for the National Physical Fitness Law(國民體力法) enacted in 1940. Asahi Newspaper(朝日新聞社), a prominent mass media outlet, provided a platform for the formation of societal consensus on the issue of national physical fitness. Particularly noteworthy is the 'National Physical Fitness Improvement Symposium(國民體力向上座談會)' held in June 1937. Government officials, along with experts from various fields including academia, labor, and sports, attended this symposium to discuss the causes of the decline in national physical fitness and potential improvement measures. Not only were policy perspectives discussed, but also vividly conveyed were the issues faced in practical settings. As a result of these processes, societal awareness of the issue of national physical fitness spread, and there was a growing chorus calling for alternative solutions to address it. The discussions and awareness spread at the societal level would go on to have a significant impact on the subsequent policy-making process. In other words, the national importance of the issue of national physical fitness, symbolized by the establishment of the Welfare Department during the wartime period, was shaped not only by political responses but also by the convergence of societal interest and awareness.

Ⅰ. 머리말

Ⅱ. 국민체력저하 문제 대두의 경위와 내용

Ⅲ. 국민체력저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응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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