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고기류와 금석문을 통해 신라말~고려초에 칭원법이 변화하는 과정과 배경을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古記류의 일부는 즉위년칭원으로 정리되었다. 그 고기류 의 찬술 시기는 「가락국기」가 찬술된 11세기말이나 구삼국사가 출현한 광종대까 지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고기류 기사의 일부는 삼국사기와 별도의 계통으로 삼국유사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일부 자료는 유년칭원으로 작성되 었다가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그 저본에서 즉위년칭원으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일부 고기류에서는 유년칭원과 즉위년칭원이 혼용되었다. 크게 보면 유년칭원에서 즉위년칭원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변화의 기점은 중대초와 고려초 사이 의 어느 구간으로 나타난다. 신라 금석문에서는 원래 유년칭원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중대를 거쳐 백 률사석당기(818)까지 이어졌다. 반면 보림사 비로자나조상기(859) 이후에는 즉위년 칭원을 사용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현왕의 즉위연차나 기년의 상당 부분이 삼국 사기 신라본기와 일치하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법흥왕대에 대해서는 저 본의 유년칭원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혼용하기도 했다. 유년칭원으로 기재된 저 본을 즉위칭원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유년칭원에서 즉위년칭원으로 변화하는 추세 속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9세기 후반경 칭원법의 변화가 시도된 것은 내부적 요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9세기 동안 빈번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왕위의 교체가 그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즉위년칭원을 시도하는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점진적이 고 불규칙한 과정을 거쳤다. 즉위년칭원법은 고려초인 949년 광종이 공식적으로 실시했지만, 동왕 후반부에는 송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유년칭원으로 돌아갔다. 현 종이 다시 즉위년칭원법을 실시하면서 즉위년칭원이 보편화되었다. 여기에는 취약 한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동기와 함께 遼의 즉위년칭원 경향이 영향을 미쳤다. 다수 의 고기류에서 즉위년칭원이 적용된 것은 이러한 흐름에 따른 것이다. 광종대와 현종대에 시행된 즉위년칭원법은 삼국사기가 이를 기준으로 삼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Some of the articles from the Gogi(古記) cited in Samguksagi were written using the first year-accession. The period in which the Gogi was written can be dated to the end of the 11th century or the Goryeo Gwangjong(光宗) period. Some of these articles in the Gogi would have been accepted in the Samgukyusa without going through the Samguksagi. On the other hand, some of the articles in the Gogi would have been written using the second year-accession, and then revised to the first year-one in Samguksagi or its text. In some of Gogi, the second year-accession and the first year-one were used interchangeably. In general, the former changed into the latter. The beginning point of the change was between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and the early Goryeo Dynasty. Originally, the second year-accession was used in Silla's inscriptions. After Borim Temple's Virojana-Jossanggi(彫像記: 859), the proportion of using the first year-one increased. On the other hand, in the article dealing with the period of King Beopheung, the second year-accession was used interchangeably. Errors also occurred in the process of converting an article in the text written using the second year-accession into the first year-one. This kind of problems occurred in the process of changing from the second year-accession to the first year-one. The reason why the Chronology was attempted to be replaced in the 9th century would have been domestic. The frequent and abnormal replacement of the throne in the 9th century would have served as a motive for attempting the first year-accession to show off its legitimacy. But those changes were gradual and irregular. In 949, Goryeo's Gwangjong officially implemented the first year-accession, but in the latter half of his reign, he returned to the second year-one. During the reign of King Hyeonjong, the first year-accession was implemented again and became common. The first year-accession implemented during the two kings' periods originated with the purpose of legitimizing the weak royal authority, and was influenced by that implemented during the Liao(遼) dynasty. The first year-accession applied to many Gogies followed this trend. This accession, which was implemented during the two kings' reigns, had a decisive influence on the authors of Samguksagi using it as a stand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