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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부여부대수령 諾思計의 출신과 투항 배경

Origins and Surrender Background of Naksagye in Buyeo-bu

DOI : 10.35160/sjekh.2023.4.4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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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諾思計墓誌」의 묘주인 諾思計가 역임한 扶餘府大首領의 해석을 통한 扶餘府와 낙사계의 출신 그리고 투항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선행연구에서는 「낙사계묘지」에 기재된 부여부와 『新唐書』 渤海傳에 기재된 渤海의 지방행정구역인 부여부를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낙사계와 관련된 부여부에 대해서 기존의 견해와 다른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낙사계는 말갈계 발해인이 아닌 粟末靺鞨인며, 낙사계가 역임한 부여부대수령은 唐의 安東都護府 관하에서 이탈한 扶餘都督府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文王 대에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다는 5경 15부 62주 체제도 일괄적으로 전부 변경한 결과물로 보기 어려우며, 기존의 명칭이나 체제가 변함없이 유지된 사례가 있던 것으로 추론하였다. 즉, 문왕의 5경 15부 62주 체제 정비 이전인 발해 武王 대에도 부여도독부의 존재는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낙사계가 역임한 부여부대수령은 선행연구에서 이해한 바와 같이 발해의 부여부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낙사계의 대당 투항 배경에 대해서는 무왕이 진행했던 대외팽창정책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았다. 낙사계 가문은 高句麗 멸망 이후 완강해진 黑水靺鞨계로 부여성 권역의 재지세력으로 성장하여 발해 건국 당시 귀부하였다. 낙사계는 이를 기반으로 부여부대수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낙사계는 기존의 말갈과의 느슨한 연합관계를 강력한 예속관계로 전환하려는 무왕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게 되면서 종국에는 당에 투항하였다. 낙사계는 자신의 묘지에 당으로부터 받은 성명인 盧庭賓이나 관직을 기재하는 대신에 투항 이전의 성명과 관직인 부여부대수령 낙사계를 기재하였다. 낙사계가 자신의 묘지에서 당에 투항 이전 성명과 관직을 기재하게 된 배경은 부여 지역 출신이라는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측면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낙사계의 정체성은 부여라는 특정 지역에 있던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In this paper, the origin of the Naksagye was examined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the government office of the Naksagye, “Buyeo-bu” written in the name of the Naksagye cemetery, and the background of the surrender. In previous studies, the local administrative districts of Buyeo-bu and Balhae, which were listed in the “Naksa-gye Myo-myeong” and “Xīn táng shū,” were identified as the same subject. In this regard, a different perspective has recently been raised on the “whether or not” related to Naksagye. According to this view, Naksagye is not Balhae, but Sokmalmalgalgalgal, and the head of Buyeo Unit, where Naksagye worked, is also a county governor of Buyeo who is out of the jurisdiction of Āndōng dū hù fǔ of the Tang Dynasty. However, in this paper, it was inferred that it is difficult to see the local system finally reorganized in the era of King Moon as a result of all changes, and that the existing name or system may be maintained. In other words, even during the reign of King Mu, before King Mun's reorganization of the local system, the existence of Fúyú-Dūdū fǔ can be guessed. Therefore, as understood in previous studies, it was considered reasonable to see the 'whether or not' of Balhae. And the background of Naksagye's surrender to Tang Dynasty was considered to be related to King Mu's external expansion policy. The Naksagye family was from Heuksu Malgal, which became stubborn after the fall of Koguryeo, and grew into a local force in the Buyeo area and participated in the founding of Balhae. Based on this, Naksagye was able to take office as the head of the Buyeo unit. However, Naksagye eventually surrendered to the Tang Dynasty due to political confrontation with King Mu to convert the existing loose alliance with Malgal into a strong subordination. Naksagye used the name and office of Naksagye, which was before surrender, instead of using the name Lútíngbīn, the name received from the party, or the official position in his cemetery. It is interpreted that Naksa-gye wrote his name and government post in the name of the cemetery before he surrendered to the party to emphasize that he was from Buyeo. In other words, I think the identity of Naksagye was in a specific area called Buyeo.

Ⅰ. 머리말

Ⅱ. 扶餘府의 해석과 諾思計의 출신

Ⅲ. 諾思計의 투항 배경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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