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근에 새로 제시된 충주고구려비 판독문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통해 연대나 비문 내용을 새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먼저 전면 7행에서 ‘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고 판독되어 연대 추정의 근거가 되던 부분을 검토했다. 종래 간지가 ‘甲寅’으로 판독되었지만 새 판독이 ‘庚寅’으로 수정하였다. 이 부분은 비석 표면이 파손되어 있어서 甲寅과 庚寅 모두 가능성이 있어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 없고 날짜도 복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날짜와 간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또한, 새로 ‘永樂七年歲在丁酉’로 판독되어 397년설의 근거가 된 전면 상단을 재검토하였다. 그 결과 ‘□嘉七年己未’로 판독하였고 479년으로 추정했다. 이 부분이 본문과 다른 시기에 새겨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자 위치가 본문의 행과 일치하기 때문에 동시에 새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에 479년으로 추정했을 때의 문제점을 검토했다. 479년에 7년이면 473년이 원년인데 이 해가 장수왕 61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개원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연호 ‘□嘉’는 금동불입상에 보이는 ‘延嘉’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 불상은 539년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니 그에 따르면 ‘□嘉’와 ‘延嘉’를 다른 연호로 봐야 하지만, 불상 연대를 479년으로 보고 ‘□嘉’가 ‘延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고구려에서 연대표기로 연호를 사용할 때 반드시 ‘歲在’라는 표현이 들어가지만 비문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현재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우측면이나 후면에 연대가 나왔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대를 479년으로 추정했을 때 비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 먼저 이 해 2월에 신라 자비마립간이 죽고 소지마립간이 즉위하였다. 비문의 5월 기사에서 ‘寐錦忌’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지만 자비마립간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太子’는 신라 태자 즉 즉위하기 전의 소지마립간으로 추정되고 고구려왕이 신라매금들에게 옷을 하사하는 내용은 즉위의례와 관련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좌측면 3행에서 ‘辛酉年’으로 판독되었지만 새 판독의 ‘功二百六十(四)’가 옳다고 생각된다. 좌측면에 몇 번 나오는 ‘功’에 대해 역역 동원과 관련된다고 해석되어 있다. 그런데 6세기 신라 비석이나 목간에 공적의 뜻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으니 공적, 특히 전공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힘을 합쳐서 전공을 세운 전투가 있었는지 검토했다. 478년에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패배한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고, 479년 동성왕 즉위시에 일본이 병사를 파견하여 고구려와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백제 동성왕 즉위를 둘러싼 혼란과 관련해서 고구려가 참가하는 전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recently proposed decipherment of Chungju Goguryeo Stele and tried to understand the dating and contents. First, ‘十二月卄三日甲寅’ in line 7 on the front has been the basis for estimating the dating. The conventional kanji (sexagenary cycle) was read as ‘甲寅’, but the new decipherment was revised as ‘庚寅’. This part of the stele is damaged, so both ‘甲寅’ and ‘庚寅’ are possible. The dating cannot be estimated by date. The upper part of the front was newly read as ‘永樂七年歲在丁酉’ and served as the basis for estimating the dating as 397. Upon reconsideration, it was read as ‘□嘉七年己未’ and the dating was estimated to be 479. Some argue that this part was engraved at a different time from the text, but it is highly likely that it was engraved at the same time because the character location matches the line of the text. Next, we discussed the problems with estimating the dating of the stele to be 479. If 479 is the seventh year, then 473 would be the first year, but since this year falls in the 61st year of the Jangsu-Wang, it is quite possible that the era name was ch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嘉’ and ‘延嘉’ shown on the gilt-bronze Buddha statue is a problem. It is widely believed that this Buddha statue was made in 539, so they should be considered as different dates. However, the possibility that ‘□嘉’ means ‘延嘉’ remains, since the date of the Buddha statue cannot be completely ruled out as 479. There is another problem that the expression ‘歲在’ is necessarily included when using the era name in Goguryeo, but there is not in the stele. It is possible that this was omitted because the date appeared on the right side or the rear side, which cannot be read at present. We examined how the contents of the stele could be understood if the date of the monument was estimated to be 479. In February of this year, Silla Jabi Maripgan died and Soji maripgan ascended the throne. In the May article of the stele, ‘寐錦忌’ was interpreted in various ways, but it is possible that it is related to the death of Jabi maripgan. In addition, the following ‘太子’ is presumed to be the prince of Silla, the Soji maripgan before the enthronement. And the Goguryeo king giving clothes to the Silla maegeum could be related to the enthronement ceremonies. It has been read as ‘辛酉年’ in line 3 on the left side, but I think the ‘功二百六十(四)’ of the new decipherment is correct. The ‘功’ appearing several times on the left side was interpreted to be related to mobilization of physical labor. However, it was used as a meaning of merit on the monuments or wooden tablets of Silla in the 6th century, so it is presumed that it was used as a meaning of merit, especially a military merit. Finally, we reviewed whether there was a battle in which Goguryeo and Silla joined forces to establish their military merit. There is a record that a rebellion broke out in Baekje in 478 and the defeated fled to Goguryeo, and there is also a record that Japan sent soldiers to fight against Goguryeo during the accession of King Dongseong in 479. It is possible that there was a battle involving Goguryeo in connection with the confusion surrounding the accession of King Dongseong of Baekje.
Ⅰ. 머리말
Ⅱ. 새 판독의 재검토
Ⅲ. 479년 설의 검토
Ⅳ.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