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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韓-曹魏 전쟁과 韓 사회의 재편

The Han-Caowei War and the Reorganization of Han Society

DOI : 10.35160/sjekh.2021.04.3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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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시 연간(240~249) 조위와 전쟁의 배경과 결과, 전후 이루어진 한 사회의 재편을 다루었다. 기리영 전쟁은 진한 8국과 관련하여 조위와 한 사이에 말을주고받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때 언쟁의 핵심은 한을 바라보는 조위의 입장과한 자신들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조위는 낙랑군과 교류했던 영남의 진한 즉 주변부 세력의 입장에서 한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를 신분고국 등 목지국 진왕 측세력은 진왕의 권위 무시와 한의 분열 획책으로 간주하고 분노하였다. 목지국 진왕은 낙랑군과 직접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에 대한 이들의 인식이 중국 측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를 직접 들은 신분고국이 전쟁을 일으켰고목지국 진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삼국지』에는 한을 멸하였다고 표현하였지만 실제 조위는 한으로부터 어떠한 배상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이는 전쟁 후에도 한이 조위에 위협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조위는 고구려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왕기를 대방태수로 임명하여 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기와 대방군 관리들은 對韓 정책에서 특별한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한 지역은 조위에 위협이 되지도 않고 도움도 되지않음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올려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던 듯하다. 이런 점에서 삼국지 한전에 묘사된 마한 모습은 객관성이 약간 결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대방군에서 이러한 보고서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조위의 대한 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쟁으로 한 지역에서는 진왕 세력이 쇠퇴하고 백제가 성장하였다. 기리영 전쟁으로 목지국 진왕이 쇠퇴하면서 대방군에 가까운 지역에 있던 세력들이 조위의침공을 두려워하여 백제를 선택한 것이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무렵으로, 백제는 무력이 아닌 주변 세력의 지지를 통해 맹주가 된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세력들은 백제를 지지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였다. 이로 인해 한은 백제, 신라, 가야 연맹, 마한 연맹 등 몇몇 세력이 대립하는 체제로 재편되었다. 호남의일부 지역에 백제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는 점은 신미국 등의 활동,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벽골제 축조 기사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This article deals with the background and consequences of the war against caowei state in the zhengshi annual(240-249) and the reorganization of han society after the war. The battle of giriyeong took place in the process of exchanging words between caowei and han regarding jinhan's eight countries. At this time, the core of the argument was that the perspective of caowei on han was different from that of han themselves. Caowei recognized ha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urrounding forces, namely jinhan in the yeongnam area, who had interacted with lelangjun. In response to this, shinbungo kingdom and other supporters of the jin king in mokgi were angry, considering it as a “disregard for the authority of the jin king and a plan for the division of han society.” Jin king in mokgi did not interact directly with lelangjun, so their perception of han was not properly reflected in china. In the end, shinbungo kingdom, who heard this firsthand, started a war, and supporters of the jin king in mokgi participated in it. Although sanguozhi described han as “destroying”, in reality caowei did not obtain any compensation from han. This shows that even after the war, han was a threat to caowei. In response, caowei appointed wangqi, who had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war against goguryeo, as the minister of daifang, to resolve the problems in han. However, wangqi and daifangjun officials did not achieve particular results in their countermeasures against han. So they seem to have tried to wrap things up by posting a report that emphasized that the han region was neither a threat nor a help to caowei. In this regard, the appearance of mahan society described in the sanguozhi han-zhuan is a little lacking in objectivity. It can also be inferred that the caowei policy on han has not been successful in that daifangjun had no choice but to publish such a report. The war led to the decline of the jin king forces in the han and the growth of baekje. As a result of the battle of giriyeong, jin king in mokgi declined, and forces near daifangjun chose baekje for fear of caowei invasion. In the mid-3rd century, during king goi's reign, baekje became a lord through the support of neighboring forces, not by force. However, the forces that were far from china did not support baekje and made a different choices. As a result, han was reorganized into a system of confrontation between baekje, silla, gaya confederation, and mahan confederation. The fact that some parts of honam did not have the power of the baekje can be seen through a construction article on byeokgol reservoir in samguksagi sillabongi, and activities of shinmi kingdom.

Ⅰ. 머리말

Ⅱ. 한-조위 전쟁의 원인

Ⅲ. 전쟁 결과와 『삼국지』 한전

Ⅳ. 전후 韓 사회의 재편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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