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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扶餘隆의 정치적 입지와 劉仁軌

Buyeo Yung(扶餘隆)’s Political Position and Liurengui(劉仁軌)

DOI : 10.35160/sjekh.2017.04.2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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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문헌자료와 부여융의 묘지명을 통해서 백제의 태자 부여융이 당으로 들어간 이후의 삶을 조명하여 보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유인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정치적 역할을 추정해 보았다. 부여융은 백제 위기였던 국가 말기에 책봉된 태자였으므로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당시 백제는 高句麗와 협력하여 新羅에 대응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 唐이 신라의 편을 들면서 백제는 더 이상 국가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것은 백제 일국의 문제였다고 보기보다는 당의 대외정책의 방향이 당시의 국제정세와 연관되면서 백제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으로 들어간 후 부여융의 정치적 입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가 泰山封禪에 참여하였다는 점과 孔子의 제사를 주관하였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또 부여융의 손녀의 존재 등을 통하여 이후 부여씨 가문 역시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았고 당조의 유력가문으로서 존속되었던 점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고토에서의 부여융의 정치적 역할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熊津都督府가 당의 명령을 받는 羈縻府였다는 점과 당시 신라가 백제 재건을 견제하고 있었던 사실 때문이다. 웅진도독으로서의 부여융의 역할은 그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였던 劉仁軌와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유인궤는 백제에서 부여융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당 고종에게 추천하였던 인물이다. 또 유인궤와 함께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劉濬이 유인궤의 아들로 웅진도독부의 관료인 參軍이었다는 점은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부여융과 유인궤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웅진도독부가 실제로 작동되던 실무 기구였을 가능성을 도독부의 속관들의 존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웅진도독부의 長史, 司馬, 參軍 등의 존재를 현존하는 金石文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장사, 사마, 참군은 당의 각종 관부의 핵심적인 관료들이며, 도독부에서도 중요한 관료다. 이로써 부여융의 활동여부와 관계없이 웅진도독부는 실제 작동되는 관부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웅진도독부에 대한 관리는 부여융이 아닌 帶方州刺史 유인궤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그가 역임한 帶方州刺史, 熊津道安撫大使, 鷄林道大總管 등의 여러 관직들은 그가 백제,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관료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비록 웅진도독부가 당이 의도하였던 대로 백제고토에서 자리 잡지는 못하였지만, 당은 여전히 대방주자사 유인궤를 이용하여 기미지배를 추진하고 있었다. 부여융은 유인궤에 의해서 백제를 대표하기 위해 내세워진 인물이다. 당은 대방주자사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고토에서의 기미지배를 지속하게 함으로써 백제고토를 이용한 대고구려전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described the life of Buyeo yung(扶餘隆), the Crown Prince of Baekje(百濟), especially the period after he went to Tang(唐) by examining relevant literature and his epitaph.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im and Liurengui(劉仁軌), one of the most indispensable persons in his life, this paper also assumed his political position in those days. Buyeo yung is assumed to have high level of political and military skill as he was appointed as the Crown Prince at the end of Baekje when the dynasty was undergoing national crisis. Baekje tried to collaborate with Gaojuli(高句麗) to confront Xinluo(新羅). However, as Tang, the huge empire, was on the side of Xinluo, Baekje was not able to maintain the nation anymore. This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the problem of Baekje, but due to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round the region that worked disadvantageously to Baekje. Buyeo yung’s political position in Tang was not poor. The fact that he had participated in the rites for heaven and earth at Taishan(泰山封禪) and that he conducted the ancestral rites for Kongzi(孔子) prove this assumption. The Fuyu’s maintained their social status in Tang dynasty by the existence of Fuyurong’s granddaughter. However, it is also assumed that Fuyurong did not play an important political role in Baekje’s native land, not only because Xiongjin Governor’s Territory(熊津都督府) was Jimifu(羈縻府) which was governed by Tang, but also as Xinluo made diversion against Baekje. Fuyurong’s role as Xiongjin’s Governor can be examined by analy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him and his political partner Liurengui. Liurengui evaluated the role of Fuyurong in Baekje positively and recommended him to Tang dynasty. His son Liujun(劉濬) who had also fought in the same battel with his father also served in one of the positions of Xiongjin Governor’s Territory, Canjun(參軍). These facts demonstrate that there was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them around Xiongjin Governor’s Territory. The fact that there existed the subordinates to the Governor’s Territory proved that the Territory was substantially working. The existence of Zhangshi(長史), Sima(司馬), and Canjun was demonstrated in an existing epigraph(金石文). Zhangsi, Sima, and Canjun are Tang’s core government officials in charge not only in the Governor’s Territory, but also in various other territories. It is assumed that Xiongjin Governor’s Territory was actually working, regardless of whether Fuyurong did work in it or not. The person who managed Xiongjin Governor’s Territory is likely to be Liurengui, the governor of DaiFang Prefecture(帶方州刺史). Many of the positions he had served, such as the governor of DaiFang Prefecture, the Xiongjindao military commissioner(熊津道安撫大使), the JiLinDao big Zongguan Fu(鷄林道大總管), etc. show that he was fulfilling significant duties in maintaining the relationship among Baekje, Gaojuli, and Xinluo. Although Xiongjin Governer’s Territory was not able to maintain their status in Baekje’s native land as Tang intended them to do so, Tang dynasty was still attempting to dominate(羈縻支配) them through DaiFang Frefecture, Liurengui. Liurengui presented Fuyurong as the one who represented Baekje. Tang had Liurengui keep governing Baekje’s native land. This was why Tang was able to plan and implement their scheme against Gaojuli, using Baekje’s native land.

Ⅰ. 머리말

Ⅱ. 태자시절의 扶餘隆

Ⅲ. 泰山封禪과 扶餘隆

Ⅳ. 扶餘隆의 정치적 활동과 劉仁軌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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