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상장의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일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분문화의 단면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고자료이다. 특히, 송산리 6호분은 전용문양전을 사용하여 축조된 중국 남조식 무덤양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웅진시기의 문화적 성격과 지배층의 정치적 동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의미와 영향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그 동안 학계에서는 6호분 피장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 공식적인 견해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향후에도 결정적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에 확인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시각에서 6호분의 축조에 사용된 문양전에 대한 분석과 묘실 전반에 표현된 장의사상의 이해에 중점을 두면서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과의 상호 관련성을 고려하여 6호분 피장자의 실체와 성격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전축분의 형태로 이루어진 6호분은 무덤의 조성 계획단계부터 전용전을 마련하여 묘실의 내부를 엄숙하게 관념적으로 장식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마련된 벽돌은 전문계열문양전으로 파악된다. 특히, 문양전 1장에 오수전 문양을 2개 또는 4개로 연속되게 표현하여 화폐가 지닌 나름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고, 더욱이 오수전문의 수량이 10,000개에 달하도록 계획하였다는 점은 주목된다. 이는 무령왕릉 매지권의 ‘錢一萬文’이란 표현과 관념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연화문을 기본단위로 묘실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불교적 극락세계를 표현한 무령왕릉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결국, 6호분의 장의관념은 무령왕릉 매지권과 서로 연결되므로 당초 매지권은 6호분에 매납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6호분의 성격은 무령왕과 왕비의 초장지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무령왕릉은 초장지인 6호분에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이 천장된 무덤이며,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고고학 증거로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무령왕릉 목관의 출토상태와 바닥판이 결실된 목관의 구조, 포개어진 상태로 확인된 관식의 출토양상에 대한 의문이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한 꾸러미로 묶인 철오수전 90개는 무령왕과 왕비의 천장시기를 大同年間(535년~545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연대 자료이다. 따라서, 『南史』와 『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볼 때 무령왕릉을 축조하고 송산리 6호분에서 천장한 시기는 541년 이후일 것으로 파악된다.
The fact that Songsan-ri Tomb No. 6 features patterned bricks made specially for the tomb reflects the influence of the Southern Dynasty style (420-589) of China. Thus, while this study is based on previously confirmed facts, it adopts a new viewpoint, with the focus on an analysis of the pattern bricks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omb No. 6 and of the funerary philosophy expressed throughout the burial chamber. It also aims to approach the identity and characteristics of the occupant of Tomb No. 6, while considering the correlation between this tomb and the memorial tablets (買地券) found in the Tomb of King Muryeong. Basically a brick chamber tomb in form, Tomb No. 6 was ideologically designed from the initial planning stage to express the interior of the burial chamber in a somber tone by making special bricks, and the bricks made for this purpose are found to be money-patterned bricks (錢文系列文樣塼). Each tile is decorated with a pattern consisting of a sequence of two or four osujeon (五銖錢), which appears to represent an attempt to convey the meaning of money. It is also noteworthy that the design appears to have been made in such a way that the total count of osujeon amounts to 10,000 patterns. Ideologically speaking, this is closely related to the expression “Currency of Ten Thousand (錢一萬文)” inscribed on the memorial tablets recovered from the Tomb of King Muryeong. In this regard, the tomb differs considerably from the Tomb of King Muryeong, whose burial chamber is elaborately decorated with lotus patterns as the main motif, expressing the Buddhist paradise. Thus, the Tomb of King Muryeong was relocated from Tomb No. 6, the first burial ground in which the wooden coffins of King Muryeong and his Queen were originally placed. Among the pieces of archeological evidence found to support this supposition are the condition of the wooden coffin found in the Tomb of King Muryeong at the time of its excavation, which cannot be regarded as a natural phenomenon; the structure of the wooden coffin, which was missing a bottom plank; and the condition of the crown decoration (冠飾) that was found folded when the tomb was excavated. In addition, the ninety iron osujeon found tied into one bundle in the Tomb of King Muryeong constitute a material that could help pinpoint the date of relocation of the tomb of the king and queen to the Daedong era (大同年間), i.e. sometime between 535 and 545. Therefore, in view of the records contained in Namsa (南史), and Samguk Sagi (三國史記),” it is estimated that Songsan-ri Tomb No. 6 was relocated to the Tomb of King Muryeong sometime around or just after 541.
Ⅰ. 머리말
Ⅱ. 송산리 호분 문양전의 양상과 의미
Ⅲ. 전문계열문양전과 무령왕릉 매지권
Ⅳ. 무령왕릉의 천장과 역연대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