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 논쟁은 1989년 소위 ‘拔萃本’ 출현을 기점으로 몇 차례 분기 설정이 가능하다. 이에 즈음해 그 텍스트를 어찌 봐야 하는지를 둘러싼 사태 전개를 1차 논쟁이라 한다면, 1995년에 공개된 소위 그 ‘母本’을 진원지로 삼는 일련의 상황 전개를 2차 논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화랑세기』 논쟁은 이종욱이 역주본을 출간한 1999년을 기점으로 『화랑세기』가 ‘열린 텍스트’가 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진입했다. 2003~2004년은 『화랑세기』 논쟁사, 혹은 그 필사자를 둘러싼 의문에서 또 하나의 분기 설정이 가능하다. 이때에 이르러 박창화가 역사가라는 행적이 완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드러난 박창화의 면모를 간단히 추리건대 그는 천재 역사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마추어 역사가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그렇기에 그 시대정신을 민감하게 그 자신의 글들에 반영한 역사가일 따름이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의 발굴은 내가 직접 관여한 일이기에, 본문에서는 그 전후 사정을 정리하려 하였다. 이후 나는 줄기차게 박창화를 역사학도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문했다. 박창화는 철두철미 시대정신에 투철한 모습을 보였다. 첫째, 그는 철저한 내셔널리스트였다. 둘째, 그의 역사학은 방법론의 측면에서 당대에 유행한 흐름과 어긋남이 없다. 이런 자세들은 현존하는 그의 거의 모든 저술을 관통한다. 하지만 그 내셔널리즘에서 예외가 있다. 그것이 바로 『화랑세기』다. 『화랑세기』에는 당대가 요구한 순국무사 화랑이 없다. 그것이 20세기 한국 내셔널리즘이 요구한 국가를 위한 忠을 구현한 ‘국민’의 이상형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살다간 그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다.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화랑세기』 문제가 정식 학술대회 주제로 올랐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가 2017년 10월 20일 이 대학 백주년기념삼성관 국제원격회의실에서 ‘南堂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을 주제로 표방한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자리는 박창화를 역사학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지만, 많은 한계를 노출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학술대회로 모든 것을 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참에 확실해진 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박창화를 이제는 『화랑세기』 필사자라는 주술에서 풀어, 역사학도로 우뚝하게 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History of controversies on the authenticity of manuscript Hwarangsegi(『花郎世紀』) can be diverged by some stages after the book appeared in 1989. Around that year, the first stage can be set when scholars debated on how we should view the text itself. The second stage can be set when scholars debated on original text(‘母本’) of the book. After then, the debates on Hwarangsegi encountered a new stage in 1999 when Lee Jong-wook published a translated and annotated version of Hwarangsegi, and it became an ‘open text’. I think that another stage on the history of controversies on Hwarangsegi or its recorder can be set around 2003~2004. At this time, traces of Park Chang-hwa as a historian showed up clearly. To sum up his traces, he was not a groundbreaking historian, and also not an amateur historian. He lived his age itself, so he reflected the spirit of the age sensitively on his writings as just one historian at his age. I participated in excavations of Park Chang-hwa’s writings about this fact., so I tried to explain the situations at that time. After then, I insisted on placing Park Chang-hwa as a historian. He followed the spirit of the age thoroughly. At first, he was a thorough nationalist. Second, his view on history does not deviate from the methodologies of historical studies at that age. These stances appear consistently on his most writings. However, there is an exception of his nationalism, and that is Hwarangsegi. In Hwarangsegi, we cannot find chauvinist warrior Hwarang. It is different from an ideal type of ‘nation people’, which demonstrates loyalty to the state and demanded by 20th-century Korean nationalism. It shows clearly that Hwarangsegi was not created in the age of Park Chang-hwa. Debates on Hwarangsegi had looked like come to a state of a lull for some time, but Hwaragsegi became a subject of an academic conference recently again. That is hosted by Korea University Center for Korean History, named as ‘A view and writings on Korean history of Namdang Park Chang-hwa’, at Global Conference Hall of Centennial Memorial Samsung Hall in 20th October 2017. This conference has an importance to place Park Chang-hwa as a historian, but also exposed many limits. However, I do not want to evaluate everything by just one trial. Nevertheless, it became obvious that we should not evaluate Park Chang-hwa as just a manuscript recorder of Hwarangsegi, but should define him as a historian.
Ⅰ. 발췌본에서 『미실』까지
Ⅱ. 역사가로 부각한 박창화
Ⅲ. 시대와 함께한 내셔널리즘 역사학도 박창화
Ⅳ. 殉國武士가 없는 『화랑세기』
Ⅴ. 핵심 비켜간 박창화 학술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