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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조영가계와 피장자

On the Builders and Occupants of Ancient Tombs in Songsan-ri

DOI : 10.35160/sjekh.2019.08.32.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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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고분군은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가족장제를 선택한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왕가의 능묘를 구릉별로 군집시켜 배치한 밀집형 능원으로 조성한 점이 특징이며, 송산을 북쪽에 두고 동쪽과 서쪽능선 상에 20여기의 능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 동안 이 능묘의 피장자로는 웅진 천도 이후 재위하였던 문주왕 ~ 무령왕까지 4명의 왕과 그들 가계의 무덤이 모두 이곳에 마련된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묘지석을 갖춘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학계에서는 이를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송산리와 교촌리고분군의 재발굴조사와 하루 밤 만에 거칠게 조사가 마무리된 무령왕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웅진시기 백제 왕가의 능묘에 대한 기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웅진천도를 전후하여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고학적 정합성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이는 선학의 연구에서 미흡하였던 부분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문헌기록과 고고자료와의 괴리를 최대한 좁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웅진기에 조영된 송산리고분군은 가계별로 능선을 분리하여 능원을 조영하는 남조의 가족장제 축조원리에 따라 운영되었으므로 형태와 구조가 유사한 ‘송산리형’ 석실인 1~4호분의 피장자상은 문주-삼근왕계로 파악된다. 또한, 501년에 피살된 동성왕은 6호분 보다 먼저 축조된 교촌리 3호 전실묘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동성왕대의 활발한 대중교섭 행위에 기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무령왕릉의 목관과 철오수전의 부장양상으로 보아, 무령왕과 왕비는 성왕에 의해 541년 무렵 송산리 6호분에서 천장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송산리 6호분은 벽화의 상태와 출토된 명문전을 근거로 볼 때,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사망한 성왕의 유해가 당시 백제의 정계를 장악한 주화파 귀족들에 의해 이곳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난제가 산적한 우리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역사의 팩트에 상응하는 고고자료의 분석과 이해는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도구이자 현실을 바르게 보는 눈이므로 앞으로 백제고고학에서 폭넓게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Ancient Tombs in Songsan-ri show the influence of the Chinese Southern Dynasties which maintained the tradition of arranging a family cemetery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Pungsu (or Feng Shui), as shown by the way in which tombs (about 20 in total) are arranged in dense groups along the two mountain ridges, one in the east and the other in the west, with Songsan Mountain to the north. It has generally been believed, at least since the discovery of King Muryeong's memorial plaque at his tomb, that this cluster of ancient tombs in Songsan-ri includes those of the four kings who ruled Baekje during the Ungjin period, from King Munju to King Muryeong, along with members of their families. Ancient tombs in Songsan-ri built in the Ungjin period were manag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tradition of the family cemetery maintained by the rulers of the Southern Dynasties in China, by which graves were arranged in groups of different generations on separate mountain ridges. Of these, the Songsalli type of stone-chamber tombs numbered 1 to 4, which feature similar forms and structures, are believed to have been connected with King Munju and King Samgeun. Experts also presume that King Dongseong, who was murdered in 501, was buried in Gyocholli Tomb No. 3, a brick chamber tomb, which was built before Tomb No. 6. The use of bricks to build the burial chamber is believed to have been connected with the brisk cultural exchange between Baekje under the reign of King Dongseong and the Chinese Southern Dynasties. The wooden coffin and iron osu (or wu zhu) coins discovered at King Muryeong's Tomb suggest that the remains of King Muryeong and his queen were moved from Songsalli Tomb No. 6 around 541 by his son, King Seong. The murals and inscribed ceramic tiles discovered at that tomb also suggest that it was used to enshrine the body of King Seong, who was killed during the Battle of Gwansanseong, by the powerful aristocrats who opposed the war. Considering that there are still several issues regarding early Korean history awaiting deeper study, the analysis and understanding of archaeological findings based on historical facts will provide a tool for breaking with fixed ideas and views in order to uncover more historically accurate perspectives. This is precisely what is needed for further study of the archaeological discoveries connected with Baekje.

Ⅰ. 머리말

Ⅱ. 송산리고분군의 분포양상과 조영가계

Ⅲ. ‘梁宣以爲師矣’ 명문전과 출토양상의 이해

Ⅳ. 송산리 6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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