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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과 경순왕 옹립

Attack on the P’os k-chong ŏ by the Later Paekche army and the Enthroning of the King Kyŏngsun.

DOI : 10.35160/sjekh.2013.04.13.175

수세적 방어에 있던 고려는 927년 1월 용주를 공격하면서 공세로 나서기 시작하여, 3월에는 근암성을 함락하고 7월에는 대야성을 격파하였다. 이에 후백제도 반격에 나서 9월에 근암성을 재탈환하고 고울부를 쳐들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927년 11월 경애왕은 “탑을 세운 뒤에 를 열고 죄인을 풀어주면 외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호국행사를 위해 비빈과 종척, 신료들을 이끌고 포석정에 행차하였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왕경에 종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왕경 주변의 군사 시설과 지리에 익숙하였다. 또한 연례적으로 거행한 세시명절이었기에 이때 왕의 일정은 거의 공개되어 있었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후백제군은 신속한 군사작전으로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포석정 사건은 후백제군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어 진행되었고, 견훤은 이미 경애왕을 제거하고 김부를 옹립할 계획을 가지고 신라 왕경을 점령하였다.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고, 수많은 인질이 후백제에 끌려간 상황에서도 경순왕의 대외정책은 후삼국의 정세에 따라 변화하였다. 때문에 신라를 병합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견훤이나 왕건 모두 인질을 잡고 군사적 압박을 통해 신라를 병합하려 하였다. 경애왕의 포석정 행차를 도덕적 타락으로 폄하하거나 이를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비약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을 약탈과 견훤의 성격 탓으로 돌리기 보다는 후백제의 건국 기반과 지지세력의 이해를 정치적 행동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In 927, Koryeo(高麗) attacked Yongju(龍州) in January, the Kunam Fortress(近巖城) in March, and the Taeya Fortress(大耶城) in July. After, Later Paekche(後百濟) counterattacked Koryeo, and retook the Kunam Fortress in September and invaded Koul-bu(高鬱府). In such a situation, in November 927, King Kyŏngae(景哀王) marched to P’osŏk-chong(鮑石亭) with the King’s Queen and court ladies, the royal relatives and the prominent officials in order to have the national event. It was because he thought that if he held the Palgwan-hoe(八關會) and set the prisoners free after erecting a tower, the foreign enemies could not do harm. Being from Sangju(尙州) and having been a soldier of the Shilla royal capital city, Kyŏnhwon(甄萱) was very familiar with the geography of the capital city in Shilla and was able to invade from Koul-bu to P’osŏk-chong directly. Because the event was celebrated as a seasonal holiday every year, Later Paekchae army that could easily know the circumstances towards the king carried out the military operations to catch King Kyŏngae as a prisoner in P’osŏk-chong(鮑石亭). When taking over the capital city, Kyŏnhwon planned to eliminate King Kyŏngae and enthrone King Kyŏngsun(敬順王). Thus the new King was enthroned by Kyŏnhwon, and even though so many people were taken hostages in Later Paekche(後百濟), the foreign policy of King Kyŏngsun changed according to the situations of Later Three Kingdoms(後三國). It is not pertinent to regard the event of King Kyŏngsun(敬順王) in P’osŏk-chong(鮑石亭) as a moral gangrene or consider the situation the cause of the collapse of Shilla Dynasty. Also, instead of blaming Kyŏnhwon for the P’osŏk-chong attack, it can be seen as a political action to establish Later Paekche and to understand its supporters.

Ⅰ. 머리말

Ⅱ. 경애왕의 포석정 행차

Ⅲ.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

Ⅳ. 후백제군의 경순왕 옹립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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