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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百濟 官制 運營의 實際

The Reality of Baekje(百濟) Bureaucracy Operation

DOI : 10.35160/sjekh.2015.04.19.37

백제의 신분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이와 관련해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로만 여겨졌던 게 골품제였다. 그런데 「흑치상지묘지명」을 통해 백제에서도 그와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음을 포착했다. 백제의 중앙과 지방 관제에 대해 6세기대에 등장한 5좌평제가 6좌평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그 이전부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좌평 기사를 일괄적으로 소급·부회한 배경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설화적인 내용을 근거로 7세기대에 백제가 최고위직을 선임했다는 근거로 잡기에는 사료 비판이 전제되지 않았다. 사비성 도읍기의 중앙 관사인 22部司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시차를 운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周禮』에서 典故를 찾을 수 있는 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라는 4개 관사는 기획된 명칭인 만큼 일괄 설치된 부서로 지목된다. 그리고 『周書』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22부사의 內官 12부 가운데 맨 앞의 ‘前內部’와 맨 끝의 ‘後宮部’에 보이는 ‘前·後’는 내관 12부의 첫 번째와 마지막 部署를 표시하는 문자에 불과했다. 그렇게 보면 이들 부서는 ‘前內部’와 ‘後宮部’는 실체가 없는 대신 ‘內部’와 ‘宮部’인 것이다. 外官 10부사 가운데 外舍部와 관련해 내관 宮部가 시사하는 바 있다. 宮部가 王宮 전반에 관한 관리, 가령 수리·건축·보수 등을 맡아 보았다면, 外舍部는 외관 10부의 廳舍 관리를 맡아 본 부서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22부사와 좌평직에 관해서는 역할이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보았다. 즉 좌평이 22부사를 관장했던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위사좌평이 예하에 둘 수 있는 부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6좌평의 직무가 22부사를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백제왕은 직속 行政 部署로서 내관과 외관을 두고 있었다. 내관은 왕궁 안에, 외관은 왕궁 바깥 도성 안에 소재하였다. 반면 좌평직은 직무 범위가 전국적이었다. 지방 통치와 관련해 한성 도읍기 후반부터 등장하는 王·侯의 分封은 담로제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分封 王·侯의 轉封은 領地를 가진 諸侯가 되어 권력을 갖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백제왕의 조치로 파악된다. 이는 陳法子 4代의 경우를 보더라도 중앙과 지방직을 오가고 있는 데서도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백제는 538년 사비성 천도 이후 전면적인 지방 지배 방식인 方-郡-城制로 전환했다. 이와 더불어 小國이나 지역 세력의 비중에 따라서 大郡과 小郡 등으로 차별 편제된 것으로 밝혀졌다. 3인의 郡將 선임 배경을 北魏의 사례와 결부 짓는 경우이다. 이 점은 차후에 명료한 검토가 필요할 정도로 시사적인 면이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군장 3인은 왕족 1명, 귀족 1명과 토착 호족 1명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다. 상호 견제 측면 보다는 토착 세력에 대한 일정한 배려라는 차원에서 郡將으로 기용했을 수 있다.

There is no data about the caste system of Baekje. In this connection Bone rank system was regarded as a Silla(新羅)‘s peculiar caste system. However, through Heukchisangji’s memorial inscription(黑齒常之墓誌銘), I caught that there was a similar to that also in Baekje. In central and local government organization, it is a common view that 5 Jwapyeong, which appeared in the 6th century, developed to 6 Jwapeong. But to make these opinions valid, the background that the articles of Jwapeong in 『Samguksagi(三國史記)』 were applied retrospectively in a lump has to be premised. However, it cannot be premised to make the thing that Baekje assigned the top spot in the 7th century basis with tale grounds. Some refers the time differences about 22 divisions(部司), which was the main government office during the Sabi period. But at least 4 government offices, titled as Sagunbu(司軍部), Sadobu(司徒部), Sagongbu(司空部), Sagubu(司寇部), we can find its authentic precedents in 『Zhouli(周禮)』. These 4 offices were established en bloc as its names were planned. And in the 12 inner offices(內官) among 22 divisions of 『Zhouli(周禮)』, there are ‘JeunNabu(前內部)’ and ‘HuGungbu(後宮部)’. Among them ‘前·後’ were just characters for marking the first and the last divisions of 12 inner offices. In this view, ‘JeunNabu’ and ‘HuGungbu’ are inessential but ‘Nabu(內部)’ and ‘Gungbu(宮部)’. Regarding ‘YaeSabu(外舍部)’ of 10 outer offices(外官), ‘Gungbu(宮部)’ is suggestive. ‘Gungbu(宮部)’ managed throughout the palace such as repair, architecture, and maintenance. It is assumed that ‘外舍部’ of outer 10 offices has managed government office building. Previous studies have shown that 22 divisions and Jwapyeong have many overlapping roles. That is, Jwapyeong was regarded to control 22 divisions. There was no division that Wisa-Jwapyeong(衛士佐平:one of 6 Jwapyeong) could command, though. Like this not all the 6 Jwapyeong’s jobs embraced 22 divisions. The king of Baekje made inner and outer officials as immediate administrative divisions. Inner officials were in the palace, and the outer ones were located in a castle town. On the other hand, the scope of work of Jwapyeong ranged on a national scale. With regard to region reign, king and royal class’s enfeoffment, which appeared in the late Hansung period, has relation with Dam’ro(檐魯) system. But their subinfeudation was an action by king Baekje, to keep from being feudal lords and getting power. We can read this tendency also in the case of Jin Beopja(陳法子)’s 4 descents. They passed between central and local government. After transferring the capital to Sabi castle, Baekje changed into Bangunsung system(方-郡-城制), a method of controling overall regions. Further, according to a minor country or importance of regional power, it was organized discriminately like large and small armies. It is the case of associating the background of 3 chiefs designation and the instance of Northern Wei. This point is suggestive enough to review clearly later. Then it has possibility that the 3 chiefs of Baekje was made up of 1 royal, 1 noble, and 1 powerful clan. Therefore it would be a kind of consideration for indigenous power rather than mutual control.

Ⅰ. 머리말

Ⅱ. 中央官職과 官府機能에 대한 檢證

Ⅲ. 地方파견 官職에 대한 檢討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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