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라 말에 최치원이 서해안 일대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던 이유를 찾기 위해서 당시의 서해 항로와 함께 최치원의 귀국 여정을 함께 살핀 것이다. 신라는 대중국 교류에 힘쓰면서 서해 항로를 개척하였다. 처음에는 한반도 서해안과 요동반도 해안을 바짝 붙어 항해하는 ‘북부 연안 항로’를 이용하였지만, 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바로 서해를 건너 중국의 산동반도로 향하는 ‘중부 횡단 항로’를 본격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뒤 8세기에 해상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남부 사단 항로’를 개척하여 운용하였다. 특히 신라 말까지 ‘중부 횡단 항로’와 함께 ‘남부 사단 항로’를 통해서 안전한 사행을 꾸려나갔다. 도당유학생이었던 최치원은 당 황제의 서신을 지닌 사신으로 신라에 귀국하였다. 여느 사신처럼 揚州와 연결된 운하를 통해서 楚州에 도착한 다음, 당나라 황해 연안의 大珠山과 乳山을 거쳐 서해를 건너 신라의 당은포에 도달하는 ‘중부 횡단 항로’를 이용하였다. 또한 당은포부터는 漢州를 관통하는 육로와 남한강 수로, 낙동강 수로를 잇는 ‘唐恩浦路’를 따라 충주, 상주를 거쳐 경주에 이르렀다. 그는 신라 서해 연안을 따라 나주의 會津에 이르는 항로, 회진에서 강주 앞바다를 거쳐 낙동강 하류 유역의 黃山津이나 울산의 開雲浦에 이르는 항로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최치원은 귀국한 뒤, 왕실의 측근 문사로 활동하면서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다. 곧 889년부터 「낭혜화상비명」을 작성하기 이전인 890년까지 병부의 차관인 侍郞을 맡아 반란군의 진압과 왕경의 방어에 힘썼고, 점차 호족세력이 크게 일어나자 893년까지 大山郡과 富城郡 등의 지방관으로 나아갔다. 그가 태수를 지냈던 곳은 서해안 지역이었다. 대산군은 서해와 잇닿아 있는 고부군의 동쪽에 자리하였다. 특히 부성군 태수를 맡았다가 견당사가 되었는데, 당시 槥城郡 태수였던 金峻도 함께 견당사가 되었다. 최치원과 김준은 경문왕계 왕실의 측근 문사이자 왕족으로, 빈공진사 급제 출신이었다. 그들은 신라 견당사의 출항지였던 당은포와 가까운 지역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사행 임무를 완수하려는 진성왕의 의지에 따라 견당사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당은포로의 일부인 竹山 일대는 箕萱과 궁예의 지배에 놓여 있었고, 견훤은 892년 이전에 이미 무주와 전주 일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최치원은 반란을 진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지방 사회를 직접 위무하는 것이라는 진성왕의 의도에 따라 지방 사회의 실상을 파악하고 혼란을 수습하려고 대산군 태수로 나아갔고, 부성군 태수로 재임하면서 대당외교의 통로인 당은포와 당은포로를 온전히 유지하려는 진성왕의 뜻을 받들고자 하였다. 그의 서해안 지방관 활동은 경문왕계 왕실을 保衛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한편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이 주관하는 여러 불사에 참여하면서 특별히 교종 불교의 宗刹인 海印寺와 밀접하였다. 당시 전국에는 12곳의 이름난 화엄사찰이 분포하였는데, 서해안 일대의 웅주와 전주, 한주에는 普願寺, 岫寺, 國神寺, 靑潭寺가 자리하였다. 다만 서해안 일대에서는 聖住寺를 중심으로 한 선종 불교 역시 보원사를 중심으로 한 교종 불교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이 지향한 것처럼 화엄사찰을 중심으로 웅주·전주 일대의 불교계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해안 일대의 주요 선종산문인 무염의 성주사를 경문왕계 왕실과 긴밀히 결연시키고자 하였다. 때문에 890년에 「낭혜화상비명」을 작성한 뒤, 바로 대산군과 부성군의 태수로 나아갔다. 그의 서해안 지방관 활동은 교종 불교를 통해서 선종 불교를 아우르려고 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을 보위하기 위한 사상적 활동이기도 하였다.
The Silla dynasty engaged in development through interacting with China. In particular, work hard to take advantage by exploiting the western seaway route. At first, the ‘Northern coastal route’ used. In the post-war perio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Central crossing route’ also be used. ‘Southern Division routes’, after service was made. ‘Central crossing route’ and ‘Southern Division routes’ is used in conjunction in the late Silla. Choi Chi-won, as an envoy of the Tang Dynasty is returned home. Like other envoy, he used the ‘Central crossing route’. through ‘the Dangeunpo road’, as far as he arrived in the capital Gyeongju. From 890 to 893, Choi Chi-won had been the local official. He was entrusted with local official of Daesan county and buseong county. It is near a west coast. At that time, Royal family Kim Jun ruled in hyesung county. Choi Chi-won and Kim Jun were friends, went to the Tang Dynasty as an envoy. those times, Gungye and Gyeonhwon had spread his forces. Choi Chi-won was entrusted with the local official in order to protect ‘the Dangeunpo road’. and also he tried to control the Buddhist community by Avatamska Sutra temple as Bowonsa temple. He tried to protect the Royal Family of King Gyeongmun as the local official.
Ⅰ. 머리말
Ⅱ. 신라 말 서해 항로의 운용
Ⅲ. 최치원의 귀국 여정
Ⅳ. 최치원의 서해안 지방관 활동과 그 의미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