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대산 오만 진신」 조와 「명주 오대산 寶叱徒 태자 전기」 조에는 ‘淨神’을 포함한 명사구가 6번 나온다. 그런데 신라에는 ‘정신왕’이 없다. 이 명사구가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와 번역서에서 이 ‘정신’을 포함한 명사구들은 다양하게 해석되었고, 나타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이는 중요 문장들에서 중요 글자들이 缺落되거나 오류가 난 결과 문장들이 불완전하게 적혀 있어 내용을 제대로 독해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오만 진신」 조의 세주에서 말하듯이 ‘신문’을 가리킨다. 이 글은 ‘정신’은 면밀하게 검토하면 어떤 위치에서나 ‘신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오만 진신」의 두 왕자 입산 기록의 ‘신라 淨神大王의 태자 보천, 효명 두 형제가 하서부에 이르러’의 ‘정신대왕’은 ‘신문왕’이다. 이는 「태자 전기」의 ‘신라 정신의 태자 보ㅅ도가 아우 효명태자와 더불어 하서부에 이르러’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정신의 태자’는 ‘寶叱徒’와 동격이다. 그러므로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아버지인 신문왕이 ‘정신대왕’, ‘정신’으로 표현된 것이다. 「오만 진신」의 성덕왕 즉위 기록의 ‘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다. 국인들이 폐하고’의 ‘淨神王’은 ‘淨神太子’로 써야 할 것을 ‘정신왕’으로 잘못 쓴 것이거나 ‘정신왕태자’에서 ‘태자’가 결락된 것이다. 이는 「태자 전기」의 ‘정신의 태자가 아우인 부군(과) 신라[서라벌]에서 왕위를 다투다가 주멸했다.’를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의 ‘정신의 태자’는 ‘효소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 문장은 ‘효소왕의 아우가 (효소)왕과 왕위를 다투었다. 국인들이 (효소왕의 아우인 부군을) 폐하고’로 해석된다. 이 사건은 700년의 ‘경영의 모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만 진신」의 세주의 ‘신라에는 정신, 보천, 효명 3부자에 대한 명백한 글이 없다.’의 ‘정신’은 ‘신문왕’을 가리킨다. 나머지 하나의 ‘정신’은, 이 말이 아마도 ‘정명’{이나, 과} ‘신문’의 訛일 것이라는 데서 關語的 言語(meta language)로 사용된 것이다. 「태자 전기」에 2번 나오는 ‘정신태자’는 위에서 본 대로 모두 ‘정신의 태자’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정신’은 ‘신문’인 것이다. ‘정신의 태자’는 한 번은 ‘보천태자’, 다른 한 번은 ‘효소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민지 기」의 ‘寶叱徒淨神太子兒名也’는 ‘보ㅅ도는 정신의 태자의 아명이다.’로 번역된다. ‘정신태자’는 어느 경우나 ‘정신의 태자’로 읽어야 한다. ‘정신태자’는 실재하지 않았다. ‘정신은 울면서 머무르기를 청하였다[淨神泣請而留].’의 ‘정신’은 ‘정신의 태자[보천태자]’를 의미하는 ‘정신태자’에서 ‘태자’가 결락된 것이다.
In ‘Daesan Oman Jinshin’ and ‘Myeongju Odaesan Botto Thaeja Jeonki’ of Samkukyusa, there appear six cases of ‘Jeongshin’. However, we cannot find ‘King Jeongshin’ in the history of Shilla. These ‘Jeongshins’ have been interpreted as referring to more than three persons mainly due to miswriting and misreading. This paper insists that all the ‘Jeongshins’ should be interpreted as only one person, ‘King Shinmoon’. As is usually known, ‘the Great King Jeongshin’ in the phrase ‘The Great King Jeongshin’s Crown Prince Bocheon, Hyomyeong, two brothers’ in ‘Daesan Oman Jinshin’ of Samkukyusa justly refers to King Shinmoon. However, ‘King Jeongshin’ in the phrase ‘King Jeongshin’s younger brother has a quarrel with King over the crown’ in ‘Oman Jinshin’ is a miswriting of ‘Jeongshin’s Crown Prince’s younger brother.’ For King Jeongshin had died ten years before 702 A.D. The phrase ‘Crown Prince’ must have been changed with the word ‘King’ by mistake. The phrase, therefore, should be read ‘King Jeongshin’s Crown Prince’s younger brother has a quarrel with King over the crown.’ ‘Jeongshin Crown Prince’ in the phrase ‘Jeongshin Crown Prince Botto with Hyomyeong Crown Prince’ in ‘Thaeja Jeonki’ of Samkukyusa should also be read as ‘Jeongshin’s Crown Prince’. Because Crown Prince must be an appositive of not ‘Jeongshin’ but ‘Botto’. So ‘Jeongshin’ is no one else but King Shinmoon, and his Crown Prince is naturally ‘Botto’. Just alike, ‘Jeongshin Crown Prince younger brother Vice King died having a quarrel over the crown in Shilla’ in ‘Thaeja Jeonki’ must be read as ‘Jeongshin’s Crown Prince died having a quarrel with his younger brother and Vice King over the crown in Shilla.’ ‘Crown Prince’ after ‘Jeongshin’ refers to Jeongshi’s first son, King Hyoso, who died in a quarrel over the crown in Shilla. There must be a ‘與[with]’ between 太子[Crown Prince] and 弟[younger brother]. And all the other ‘Jeongshins’ in various contexts such as ‘Minji Ki’ and footnotes of ‘Oman Jinsin’ can also be read as referring to King Shinmoon.
Ⅰ. 서론
Ⅱ. 이 시대에 대한 삼국사기 의 증언
Ⅲ. 「대산 오만 진신」과 「명주 오대산 寶叱徒태자 전기」의 관계
Ⅳ. 보천태자, 성덕왕의 입산 기록 검토
Ⅴ. 성덕왕 즉위 기록 검토
Ⅵ. 「閔漬記」의 검토
Ⅶ.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