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간 단양지역의 영유권 향방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곧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에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빼앗았는데, 이때 고구려가 단양지역을 포함한 죽령로를 차지하였다. 이후 단양지역은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의 신라·고구려 간 우호기에는 대외교섭과 문물교류의 중간 기착지로서 자리매김했고,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의 갈등기에는 고구려 최남단 군사 요충지로서 부상했다. 고구려의 주요 남진경로로 죽령로가 활용된 문헌적 정황은 춘천-홍천-원주-충주 등지의 죽령로 도상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이 지속적으로 발굴됨으로써 실증되고 있다. 다만 단양지역의 고구려 고고자료는 아직까지 미흡한 실정이다. 이는 단양지역과 그 인근에 남아 있는 관방유적에 대한 향후 발굴성과에 따라 보완될 여지가 많다. 한강 유역의 영유를 주도했던 고구려에 대해 나·제동맹군이 반격을 개시한 것은 551년 9월이었다. 이때 신라는 죽령 이북의 북진 교두보였던 단양을 출발해 죽령로를 경유해 삭주(우수주) 관내의 10군을 장악하였다. 곧 신라는 한강 유역 공략에 나섰던 551년 9월 이전에 이미 단양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의 단양지역 진출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시사해주는 자료가 「단양신라적성비」이다. 「적성비」의 내용에는 신라가 적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교전을 했고, 그 때 적성에 있었던 야이차의 도움을 받아 적성을 차지한 듯한 문면이 남아 있다. 「적성비」가 야이차의 공을 포상함으로써 향후 북진의 향방을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선전포고문의 성격이 짙은 점을 감안할 때, 비의 건립연대와 신라의 적성 진출시기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적성비」의 건립연대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545년 이전, 545~550년, 551년 이후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했었다. 이에 대해 550년 정월과 3월에 벌어진 신라의 도살성·금현성 함락, 그리고 이어진 진흥왕의 낭성 순수와 이사부의 군사행적을 계기적으로 분석한 결과, 550년 중후반 무렵 신라가 적성지역에 진출한 후 비를 세운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신라의 적성 진출경로로는 죽령로를 작전의 중심선으로 삼아 벌령로(적성로)에서 협공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했다. 더불어 신라가 단양보다 국원[충주]에 먼저 진출했을 경우를 가정해 국원 방면과 남한강 상류의 정선·영월 방면 등 전방위적으로 압박한 결과일 수도 있음을 환기하였다.
Territorial Trend among Three Kingdoms over the Danyang area was appeared in the late 4th. In 396 years, King Gwanggaeto(r.391~412) occupied 58 castle and 700 village by Baekje. At This time Goguryeo occupied Danyang area and Jungnyeong route. Since then Danyang area has established itself as a stopover for foreign negotiations Between Silla and Goguryeo in the late 4th century~middle 5th century. Also It was emerged as Goguryeo's southernmost military hub in the middle 5th century~middle 6th century. In 551.9, Silla attacked with Baekje The Han River Basin it was occupied by Goguryeo. At This time Silla occupied 10gun(郡) by Danyang departure to the via Jungnyeong route. Finally Silla occupied Danyang area in more than 551.9 ago. If we look a little more specific, Silla occupied Jeokseong Fortress in the middle and late 550 years. Jeokseong Monument of Silla in Danyang(「丹陽新羅赤城碑」) was erected at the same time. Meanwhile, The Route of Advance to Jeokseong Fortress was rich possibilities that used Jungnyeong route and Beolnyeong route at the same time.
Ⅰ. 머리말
Ⅱ. 고구려의 남방 진출과 단양지역 영유권의 향방
Ⅲ. 신라의 단양지역 진출시기와 경로
Ⅳ. 맺음말 : 단양진출의 신라사적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