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彌勒寺 舍利奉安記」(이하 사리봉안기)는 2009년 彌勒寺址 西塔 해체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伽藍을 造立하고 사리를 봉안한 주체가 百濟王后인 佐平 沙宅積德의 女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대도 己亥年(639)으로 나와 있어 武王(600~641)의 재위 기간에 미륵사 서탑에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리봉안기는 무엇보다도 백제왕과 귀족세력의 관계, 즉 武王‧義慈王代 정치적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이 글에서는 沙氏세력이 무왕대 말기부터 백제 멸망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사리봉안기의 정치적 의미를 義慈王(641~660)과 사씨세력간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무왕은 안정적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었다. 무왕은 자신이 어렵게 왕위에 올랐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때 의자의 입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특히 자신의 재위가 길어짐에 따라 의자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의자가 무왕 자신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정사를 돌보게끔 하였다. 한편 자신은 대내적으로 기존 세력의 동조를 구하는 정치적 행위를 지속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唐과의 외교를 주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에 의자는 무왕대 활동했던 중앙세력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왕이 살아있었지만, 의자는 일찍 왕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무왕은 上王이자 大王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의자는 大姓八族이면서 중앙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었던 사씨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어 무왕대 활동했던 중앙 세력의 비대화를 막고자 하였다. 그리고 의자는 사씨세력이 미륵사에 탑을 세우는 등 아버지인 무왕을 숭앙하는 동시에 기존세력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불사 활동에 참여토록 하였다. 이는 아버지인 무왕을 신성화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자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의자는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왕 사후 의자왕은 왕 자신과 왕후 세력을 중심으로 다시금 세력을 재편하고자 하였다. 의자왕 재위 초반 사씨세력을 대상으로 한 난이 발생한 것도 사씨세력의 권력 강화를 경계한 무왕대 國主母 세력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결국 의자왕은 전제왕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 세력을 귀양보냈으며 사씨세력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에 사씨세력은 의자왕대 지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The Saribongangi in Mireuksa’(彌勒寺舍利奉安記)was uncovered on the western stone pagoda of Mireuksa removal in 2009. The Saribongangi was recorded that a daughter of Joapyung(佐平) Sahtaek-Jeokdeok(沙宅積德), the queen of Baekje dynasty, was the one who built the pagoda and enshrined Sari. It said year of 639, We could know Sari was enshrined in the western stone pagoda of Mireuksa during King Mu(武王: 600~641)’s rein. Most of all, the Saribongangi must be very important data, we could look into relationship about King of Baekje and noblemen, that is political trend of King Mu and King Uija(義慈王: 641~660)’s period. In this article, Paying attention to the Sah clan maintained the status from late King Mu to the collapse of Baekje, Trying to interpret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 Saribongangi in a relationship about King Uija and the Sah clan. King Mu was not a man who stably take the throne. King Mu should secure Uija’s position during his reign, recalling the tough experience his rising on the throne. Especially, as the King’s reign becomes longer, he wants to build foundation that Uija can assume the throne stably. So, King Mu let Uija substantially manages the affairs of state on behalf of himself. Meanwhile, He internally maintained seek accord to existing local forces, and externally strengthened royal authority by leading diplomacy with Tang dynasty. So Uija can take lead a political situation by calming the resistance of existing political influences. Despite the King is alive, Uija was able to act as King. And, King Mu acquired the position as the abdicated King and the great king. Meanwhile, Uija tried to avoid growing bigger of central forces by getting married to the Sah clan, the eight grand families nobility(大姓八族), who were excluded by existing local forces. And, Uija let the Sah clan take part in the affairs of buddhist service, such as building a stone pagoda in Mireuksa, for admiring the King and appeasing discount of existing local forces. It was Uija’s political strategy, reinforce his status by sanctifying the King Mu, his father. Through these activities, Uija could assume the throne stably. However, after King Mu’s death, King Uija wanted to reorganize the power with the King and queen’s relatives. Early reign of King Uija, existing local forces raised rebellion targeting power strengthening of the Sah clan. But King Uija strengthened the bonds of the Sah clan, and banished existing local forces. So, the Sah clan could keep on exercising political influence.
Ⅰ. 머리말
Ⅱ. 『舍利奉安記』와 泗沘시기 沙氏세력의 동향
Ⅲ. 武王말기 정국 운영과 義慈의 왕위계승
Ⅳ. 義慈王의 정국 운영과 沙氏세력과의 관계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