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신라 중대기의 주요 불사리장엄구에 보이는 양식적 다양성의 의미에 대해서, 연구사적 시각에서 재검토한 문화사학사적 연구이다. 신라 중대기의 불사리장엄구는 현존하는 양이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왕실 발원의 주요 사리장엄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불교조각이나 건축과 같은 다른 불교미술 분야와는 달리, 신라 중대 불사리장엄구들은 당나라의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하나의 뚜렷한 시대 양식을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양식적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수한 조형적 양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적 다양성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먼저 불사리장엄구라는 조형 분야의 특성 자체가 한번 만들어져서 탑에 매납된 이후에는 다시 세상에 보여지지 않고 숨겨진 채로 보존된다는 고분, 혹은 타임캡슐과 같은 성격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신도들 앞에 드러나서 숭앙되는 불상이나 건축물과는 매우 다른 특징이기 때문에, 같은 양식의 사리장엄구가 재현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게 된다. 그러므로 같은 양식의 사리장엄구는 동시에 만들어지는 쌍탑의 경우와 같이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러한 다양성의 문제는 삼국 통일의 완수와 그에 의한 백제 및 고구려 장인들의 신라 유입과 관련이 있다. 특히 백제의 멸망 이후 상당수의 장인들은 신라 사회로 편입되면서, 그들의 공예 기술이 신라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의 발굴과 함께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러한 다양한 장인들과 유민들의 통합에 있어서 신라는 고유 불교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융통성을 발휘하여 다양성의 조화를 이루어내고자 노력했는데, 이때 중요시되었던 것은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의 “一心”과 “和諍”이라는 융통성있는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성의 공존과 조화”라는 문화 형성이었다고 추정된다. 왕실을 비롯한 지배계급에 의해서 발원된 신라 중대의 주요 불사리장엄구에 보이는 양식적 다양성은 바로 이러한 삼국 통일 이후의 새로운 조형성과 사상의 수용과 공존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국 및 호법 관련 불교 사상과 관계된 불사리신앙과 장엄은 왕실을 비롯한 신라 중대 사회의 지배계급이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신라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지를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나타난 조형적 결과물로서, 당시 불교와 사회 문화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물질문화적 자료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In this article, I surveyed the stylistic multiplicity of Buddhist reliquaries in the Middle Silla period and its meaning in terms of cultural historical study. Here, I overview the historiography of the study on the Buddhist reliquaries in the Middle Silla period, focused several important excavation examples, such as Gameunsa temple pagodas reliquaries and Hwangboksa temple pagoda reliquaries. The remaining examples of this period are enormous, but only the several fine examples are made for the royal family of Silla. However, these royal Buddhist reliquaries have revealed the stylistic multiplicity instead of the new unified style of Buddhist sculptures of the same period. Such stylistic multiplicity of Buddhist reliquaries in this period is very special and unique artistic feature of that time. This characteristic of “stylistic multiplicity” during the Middle Silla period comes from two major causes. The first cause is the original characteristic of the Buddhist reliquary genre which had to be enshrined in the hidden place of a pagoda just after it was created. Buddhist reliquaries have the same characteristics of the grave goods or time capsule. Thus the similar style artifacts could be made only in a certain limited time period and space. The second cause is the cultural historical distinctiveness resulted from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 by Silla during the late seventh century. Especially after the collapse of Baekje kingdom, many craftsmen of Baekje might have been integrated to the Silla society. Several technical affinity of Buddhist reliquaries of Mireuksa in late Baekje and of Gameunsa in the early unified Silla suggest the possibility of such hypothesis. The elites of Silla society wanted to rule and integrate the unified country and peoples by the Buddhist ideology of “Harmonization, or Hwajaeng (和諍)” and “One mind, or Ilsim (一心)” in the original Silla Buddhist thought. During such period of social changes, the royal family of Silla created and formed the stylistic and technical diversity of Buddhist relic cult from everywhere not only traditional Silla but also Baekje and Tang China for the social unification and stabilization of the nation. The stylistic multiplicity of Buddhist reliquaries in the Middle Silla remind us not only of Buddhist cultural efforts for the Silla elites but also of the sudden social changes after the collapse of the other two Kingdom, Baekje and Goguryeo.
Ⅰ. 머리말
Ⅱ. 신라 중대 불사리장엄의 연구 경향과 현존 유물
Ⅲ. 신라 왕실 발원 사리장엄구와 호국 불교
Ⅳ. 신라 중대 불사리장엄구에 나타난 제작방식의 변화와 삼국통일과의 관계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