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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서울 百濟古墳의 保存과 發掘

Preservation and excavation of Baekje tombs of Seoul: Royal Tombs in Seokchon-dong

DOI : 10.35160/sjekh.2016.08.23.291

고고학은 현장에서 연구하는 학문인데 가끔 현장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어려운 제5공화국의 강남지구 신도시개발 시기에 돌 하나 풀포기 하나라도 더 살려내려고 학계에 호소하고 정부와 관계기관에 설득하고 건의하여 정부(제5공화국)로부터 보존 결의를 이끌어 내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保全해 낸 유적이다. 필자가 서울의 한성백제 유적과 문화재를 찾아내고 현장을 지키자고 주창하고 보존 활동을 벌여 온지도 벌써 40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서울 石村洞은 백제 전기 백제 수도의 분묘지역이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는 원래 돌이라고는 나오지 않는 넓은 충적 평야, 즉 廣州平原이다. 그런데도 돌이 많이 있다 하여 일명 石村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석촌동 언덕배기는 원래 5개의 작은 산처럼 돌무더기가 쌓여 있어 일명 五峯山이라고 하던 곳이다. 그 돌은 바로 백제 적석총에 쌓였던 돌이다. 이 일대에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89기(총독부박물관 내부문서에는 290여 기)의 백제고분이 있었다. 198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강남에 노폭 35m의 큰길[지금의 백제고분로]이 생기면서 국가 사적 제 243호인 백제 전기 王陵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호분·4호분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돌로 쌓은 피라미드식 백제 ‘왕릉’이 파괴되고 주변의 백제 고분이 훼손되었으며 심지어는 포클레인의 삽날로 인골이 잘려나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잠실 석촌동을 방문했던 1981년 가을은 한창 강남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포클레인에 잘려나가고 백제 지배층의 분묘들이 삽날에 찍혀 인골이 나딩굴고 있는 현장은 마치 전쟁터 같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언론과 학계에 호소하고, 한편으로는 정부와 서울시에 건의하고 설득한 결과, 마침내 정부(제5공화국)로부터 보존 결의를 받아냈다. 1985년, 정부(제5공화국)는 서울 강남지구 도시개발의 문화재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백제고분로’의 기존 지상도로계획을 바꿔 지하차도를 건설하여 도로로 잘려나간 백제 ‘왕릉’을 복원하고, 사적의 범위도 10배나 확대하여 백제고분들을 保全하기에 이르렀다. 정부가 석촌동 고분군을 보존하기로 결의한 후에 도로공사로 백제시기의 옹관과 인골이 잘려나간 석촌동 3호분 동쪽 구간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소위 ‘석촌동 3호분 동쪽 고분군’의 상·중·하 3개 유적층에서 모두 23기의 백제고분이 확인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석촌동 3호분 동쪽 고분군’의 남쪽으로 1만여 평의 보호구역이 추가로 확대되고, 확대된 보호구역 안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남쪽으로는 1·2호분과 A호분이 확인되고 토광묘와 석곽묘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석촌동 3·4호분이 연결 복원되고 3호분 동쪽에서 수많은 유적이 되 살아나서 오늘날과 같은 대단위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15년에는 석촌동 고분공원의 보호수인 ‘老巨樹木’ 부근에서 적석총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들 지역은 이미 1983년 「한강유역 백제전기 수도유적 보존문제」에서 유적의 존재를 고증했던 곳이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보존의 성공은 바로 풍납토성에서 왕궁유적을 발견하는 前兆이다. 본 논문은 서울의 백제유적을 오늘만큼 보존하게 된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 집필되었다. 필자의 근 40년 동안의 서울 백제유적 조사 연구와 보존 활동은 口傳되는 것보다 기록으로 남아야 할 자료들이 훨씬 더 많다. 그 많은 기록들이 한데 모일 기회를 찾지 못하고 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에서 작성한 것이 이 논문이다. 어떤 문제는 논증하기도 하였지만 보존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동안 備忘錄으로만 묻혀왔던 것을 이번 기회에 끄집어내어 사실 그대로 작성하였다. 동시에 이는 한성백제사를 규명하기 위한 현대의 ‘史草’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로 국민의 힘을 이끌어 낸 사실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서울의 한성백제가 500년이나 존재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구현해 낸 것은 바로 국민의 힘이다. 이것은 偶然도 아니요 더욱이 奇蹟도 아니다. 그것은 必然이다. 이토록 위대한 힘을 이끌어 낸 것은 국민이다.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국가의 絶對 作品이다.

Archaeology is at field but it is forgotten from time to time. Royal tombs in Seokchon-dong, Seoul were preserved as an international heritage by persistent appeal to the academia and suggestion/persuasion to the government to keep every single piece of rock and grass during the Gangnam development period of the 5th republic. It has been almost 40 years of preservation and excavation of the historic sites of Hansung Baekje, Seoul. Seokchon-dong(石村洞), Seoul is a grave field of the capital in the early period of Baekje dynasty. This area is a wide alluvial plain, Gwangju plain, where no rocks are to be found. However, it is called Seokchon (Stone village, 石村) because stones are easily found. Small hills in Seokchon-dong has been named Obong-san (five peak mountain, 五峯山) because there were five piles of hill-like stones. Those stones came from Baekje’s stone mound tomb. There were 89 Baekje tombs around the area until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early the 1980’s, 25m-wide main road (current Baekjegobun-ro) was built through national historic relic No. 243, between 3rd and 4th tomb which were assumed to be royal tombs of the early Baekje dynasty. Due to this fact, Baekje’s pyramid type ‘royal tombs’ made of stones were damaged and even the buried bones were destroyed by the blade of the excavators. It was in the middle of the Gangnam development when I visited Seokchon-dong in autumn of 1981. It was an extreme tragedy to see the development sites where the tombs assumed royal were destroyed and the human bones were scattered all around . To restore this, I appealed to the government and the academic authorities through the press and finally got approved by the government (5th republic). The government (5th republic) widely re-designed the policies of cultural asset about the Gangnam development plan. Baekjegobun-road was preserved by adjusting the road plan to built it underground, and by rebuilding the historic relic site expanding it ten times bigger in size. In 1985, after the government initiated the preservation project of this area, they got investigation results of the east side of the 3rd tomb of the earthenware coffin which were damaged from the road construction. They found out that in the area so called ‘east tombs of the Seokchon-dong 3rd tomb’, 23 Baekje tombs in total were confirmed to be in three (top, middle, bottom) layers. Furthermore, around 33,000㎡ of the conservation area was additionally designated in the south part of ‘east tombs of the Seokchon-dong 3rd tomb’ and the research was done in this new conservation area. The 1st, 2nd and ‘A’ tombs were confirmed as pit burial tomb and stone-lined tomb, and the 3rd and 4th tomb which were disconnected by the road were reestablished and many of the relics were restored in the east area of the 3rd tomb. Finally a huge size of the relic park was created as today. These areas were already studied in the conference of “Preservation issues of the relics in the capital of early Baekje around Han river” in 1983. The memorial services of Hansung Baekje in Songpa-gu, Seoul were normally continued from pit burial tomb to wooden coffin tomb and then to stone-lined tomb or stone mound tomb in Seokchon-dong. We need to focus on the transition of Seoul Baekje’s memorial services continued to stone chamber tomb in Garak-dong tombs and then to Bangyi-dong tombs.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ntroduce the history of the preservation of Baekje’s heritages in Seoul. Regarding 40 years of my studies on the preservation of the relics of Seoul Baekje, what should be written gains more importance than what could be told. This article is to leave behind all those records which may just disappear and to avoid inefficient time loss to regather them. Perhaps it could be used as one of the sources to clarify the history of Hansung Baekje. Realization of Hansung Baekje’s 500-year-old history is not a coincidence o

Ⅰ. 머리글

Ⅱ. 日帝强占期의 서울 百濟古墳實態調査

Ⅲ. 서울 百濟古墳의 實相과 保存活動

Ⅳ. 「漢江流域百濟前期首都遺蹟保存問題」學術硏鑽開催

Ⅴ. 서울 石村洞古墳群保存決定

Ⅵ. 서울 百濟古墳保存決定後의 發掘結果

Ⅶ. 서울 石村洞古墳群保存과 言論의 役割

Ⅷ. 맺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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