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한국고대사탐구학회.jpg
KCI등재 학술저널

사찰구조와 출토유물로 본 芬皇寺성격 고찰

DOI : 10.35160/sjekh.2009.12.3.39
  • 22

芬皇寺는 善德王(632~647재위) 3년(634) 정월에 완성하였으며, 일명 ‘王芬寺’라고도 한다. 분황사의 창건배경과 성격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 선덕왕의 왕위 계승 두 돌을 기념하여 분황사를 낙성하였고, 皇龍寺ㆍ皇福寺ㆍ皇星寺 등과 같이 신라왕실의 원찰을 의미하는 ‘皇’자를 사용한 왕실사찰이다. 이 논문에서는 분황사의 가람 배치의 구성과 그 의도, 그리고 탑 내에 매납된 사리기의 구조와 그 계보를 살펴보아 사찰조영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분황사의 사찰구조가 삼국시대 불교를 수용한 이래 여전히 사원의 중심이 탑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리가 안치된 탑을 중심으로 탑의 후면에 불전을 배치하고 강당은 계획되지 않았다. 3개의 불전은 기존의 ‘고구려식 삼금당 배치 유형’을 받아들인 위에 동서금당의 방향전환과 탑의 이동 등 ‘品’자형 가람배치로 변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탑의 위치이동과 동서금당의 남향으로의 방향전환은 이 시기 새로운 불교신앙의 수용으로 인한 의례형식의 변화로 기존의 탑이 위치했던 중심공간의 확보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당초 사찰계획 시 강당이 축조되지 않은 것과도 연결되며, 불교의례를 중시한 北朝佛敎와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탑을 중심으로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축조되는 ‘一塔一金堂式’ 백제사찰 배치유형에서 보여주는 현학적인 남방불교와는 대조를 보이는 것으로, 분황사가 북조불교의 맥을 계승한 隋代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기존의 목탑건립 풍조에서 석탑으로 대체되면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의도하고 있는 것 또한 분황사의 축조에서 보여지는 주목되는 부분이다. 석탑이 건립되면서 기존 목탑의 경우 지하심초석이나 지상의 심주석에 사리공을 뚫어 사리를 안치하는 방식에서 석탑의 2층 탑신석에 안치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사리를 담는 사리기를 유리병과 은합에 넣고 다시 이를 석함에 넣어 갈무리하는 사리장엄의 병렬안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또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방식이다. 이는 北魏시대부터 이어지는 중국의 사리장엄 방식이 수대에 오면서 통일된 규범의 仁壽舍利器 안치방식의 확산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리공양품의 안치는 수대 인수사리탑 안치 방식을 따라 盝頂型舍利石函ㆍ銀盒유리병의 多重容器에 사리공양품을 안치하였다. 특히, 그동안 고려시대 유물로 비정해왔던 은합이 기형이나 제작기법 등을 통해 창건기 유물로 보았으며, 공양구와 관련하여 일제시대 수리 당시 보고서를 검토하여 崇寧重寶가 일제시대 수리 시에는 보이지 않던 유물로 후에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아 사리공양품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사리기와 공양품은 모두 창건 당시에 매납된 것으로 후에 재매납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리고 공양품 중에는 여성용품이 특히 많은 것이 두드러지며, 이는 선덕왕의 봉헌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밖에도 공양품에는 인도 귀걸이와 동남아 연안 산 패각류의 외래품이 포함된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를 입증하는 것들로, 이를 통해 신라의 대외교류와 교역로에 대한 연구자료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전체 공양품의 내용으로 보아 탑에 안치된 불사리공양품이 당시의 墳墓埋納品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분황사의 창건과 석탑의 축조, 사리안치 방식 등 새로운 변화의 동인은 진평왕대와 선덕왕대에 이르는 7세기 초반의 中國留學僧 가운데 隋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에서 활약하고 있는 수 유학승들의 두드러진 활약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분황사의 창건은 인수사리탑 건립을 통한 수 통일 이후의 정신적인 통합과 왕권강화를 도모한 수 文帝를 모델로 여왕통치의 허약성을 극복하고 선덕왕의 왕권강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芬皇寺創建于新羅善德女王(632-647在位)三年(634年)正月, 又叫“王芬寺”。到目前爲止, 圍繞芬皇寺的創建背景及性質問題進行了很多硏究, 其中最具說服力的主張是爲了紀念善德女王的王位繼承二周年而建立芬皇寺, 像皇龍寺、皇福寺、皇星寺等寺院那樣, 以“皇”字取名, 意味着新羅王室的寺院。本論文主要說明芬皇寺的寺院結构及其意圖、塔內舍利器的結构及其体系, 査明寺廟結构的性質。自從三國時代接受佛敎以來, 芬皇寺的寺院結构仍然以塔爲中心。也就是說, 以供奉舍利的塔爲中心, 在塔后面設有佛殿(金堂), 沒有建立講堂。以三个佛殿爲例, 采用“品”字形寺院結构, 在原有的高句麗式三金堂形式的基础上, 轉變東西金堂的方向,移動塔等, 發生了一些變化。這樣, 移動塔的位置, 將東西金堂的方向轉變爲南向, 這可以解釋爲当時接受新的佛敎信仰以后, 礼儀形式發生了變化, 因此有必要确保原有塔的中心空間。這不僅与当初計划建設寺院時沒有建立講堂息息相關, 而且与重視佛敎礼儀的北朝佛敎有緊密關系。這与“一塔一金堂式”百濟時代寺院結构形成鮮明對比, 這一結构是以塔爲中心, 金堂和講堂建立在一條南北直線上, 這就是南方佛敎的特点。從中可見, 芬皇寺受到繼承北朝佛敎的隋代佛敎的影響。此外, 令人矚目的是建筑芬皇寺時擺脫以往的木塔方式, 采用石塔方式, 某求打破固定觀念, 樹立新的觀念。過去建立木塔的時候, 在地下心础石(木柱中心基石)或地上心柱石鉆孔供奉舍利, 而建立石塔以后, 采取不同方式, 在石塔2層塔身石供奉舍利。將裝舍利的舍利器放在玻璃甁和銀盒, 然后把它放在石盒保管,采用舍利庄嚴的幷列安放方式, 這与過去的方式完全不同。中國舍利瘗埋方式從北魏時代繼承到隋代, 到了隋代, 實現仁壽舍利容器安放方式的統一, 擴散到全國各地。安放舍利容器,根据隋代仁壽舍利塔安放方式, 把舍利容器安放在盝頂形舍利石函、銀盒、玻璃甁的多种容器。有其, 銀盒一直被認爲是高麗時代的遺物, 但是通過基本形式或制造方法, 判斷這是創建時的遺物, 還有, 檢討日本帝國時代修理時報告, 發現崇宁重宝不是日本帝國時代修理時的遺物, 因此, 在舍利容器与共樣品中排除在外。從中可見, 舍利器和供養品都是創建当時埋藏的, 從此一后再也沒有埋藏遺物。還有, 在供養品中, 女性用品特別多, 這可以理解爲這些都是善德女王奉獻的。除此之外, 在供養品包括印度耳环和東南亞沿海地區貝殼類船來品, 這就証明新羅時代對外交流十分活躍, 通過此, 确保了新羅時代對外交流和交易渠道的硏究資料。考慮到整个舍利容器与共樣品的內容, 安放在塔的佛敎舍利容器和共樣品与当時的墳墓埋藏品有關。從中可見, 芬皇寺創建、石塔的建筑、舍利安放方式等新的變化句隋代留學僧侶息息相關, 從眞平王到善德女王的7世紀初中國留學僧侶在新羅積极展開活動展露頭角。据推測, 善德女王, 將建立仁壽舍利塔致力于實現隋時代統一以后的精神統一幷加强王權的隋文帝当作榜樣, 建立芬皇寺, 某求加强女王統治權利, 弥補政治上空白, 鞏固善德女玉的王權。

Ⅰ. 머리말

Ⅱ. 芬皇寺 건물배치로 본 사찰의 구조

Ⅲ. 출토유물 검토

Ⅳ. 芬皇寺의 축조배경과 그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