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들은 國亡 혹은 國難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文弱’을 발견했다. 간단히 말해 文에만 치우쳐 武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초래했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文弱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그 극복 방안으로서 尙武정신을 재발견했다. 이는 동아시아 3國에서 공통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이순신과 을지문덕으로 대표되는 救國의 영웅들이 재발견되고, 신라의 ‘화랑정신’이 재발견됐다. 조선에서의 이런 흐름의 직접 단초를 연 이는 중국인 양계초였다. 1898년 戊戌政變 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언론활동을 통해 ‘국민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 일환으로 새로운 國民像으로 ‘新民’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도덕윤리 중 하나로 충만한 尙武精神의 무장을 들었다. 양계초는 중국이 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文弱의 병폐를 들었다. 사회진화론에 충실한 그는 “중국이 진정으로 문명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文弱한 풍조를 청산하고 상무정신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와 같은 진단은 결국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 즉, 新民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文弱을 몰아낸 자리엔 충만한 尙武精神이 차지해야 한다. 이런 尙武精神을 체득한 國民이 주인인 國家는 종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한 君主를 대신한다. 王에서 國家로 권력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국심(조국애)이야말로 양계초가 새로운 중국에 대해 제시한 ‘시민종교’였다. 이런 양계초의 생각이 조선에도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양계초의 그것은 일본 망명생활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尙武精神을 강조하는 양계초에게 『中國之武士道』라는 저서가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1904年 간행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양계초 본인은 서방과 일본 같은 外國人이 중국을 깔보면서 “중국의 역사는 武의 역사가 아니며 중국의 민족은 武의 민족이 아니다”는 말에 격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중국사에서 상무정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존재로 무사도라는 존재를 배양하게 한 직접 동인은 日本 武士道였다. 이 일본 무사도는 니토베조에 이르러 비로소 ‘大和魂’으로 재발견됐다. 189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어판으로 먼저 나온 니토베의 『Bushido』는 그 부제가 ‘the Soul of Japan’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그동안 일본을 열등한 동양의 한 국가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일본 근대국가 이데올로그가 던진 반항이었다. 니토베는 ‘Bushido’를 중세 서양의 ‘기사도’에 비견하며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중세에 있었음을 찬양했지만, 이것이 근대 일본의 創案이자 ‘발견’임은 그와 동시대를 일본에서 보낸 영국인이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즉, B. H. CHAMBERLAIN은 1912년 발표한 ‘the Invention of a New Religion’이라는 글에서 당시 일본사회에 천황숭배(Mikado-worship)와 일본숭배(Japan-worship)가 일본의 새로운 종교(the new Japanese religion)로 대두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Bushido 또한 “10년 혹은 20년 전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Bushido라는 말 자체도 1900년 이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1900년이란 바로 니토베의 『Bushido』가 간행된 시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이는 『Bushido』가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끼친 저술이었는지를 확인케 한다. 니토베는 Bushido를 일본의 새로운 “규율의 기관 혹은 규율 코드”(an institution or a code of rules)로 발견하면서 그 도덕윤리로는 義·勇·仁·禮·誠·名譽·忠義를 적출하는 한편, 그 특징으로 割腹과 칼을 제시하면서 마침내 “무사도야말로 야마토 다마시”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Bushido는 니토베에게 국민국가 일본이 필요로 하는 국민의 도덕윤리였던 것이다. Bushido 혹은 武士道는 니토베에게서 비롯되고 梁啓超를 거쳐 마침내 한국에도 상륙해 文弱의 병폐를 쓸어버리고, 尙武精神을 표상할 수 있는 존재로 급속히 재발견되기에 이른다. 조선의 무사도를 표상하는 발견이 바로 ‘花郞’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이데올로그들에게 화랑이야말로 국민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國民像, 즉, 滅私奉公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殉國武士로 제격이었다. 니토베가 기획한 일본의 무사도, 양계초가 이어받는 중국의 무사도에 대비되어 그 ‘조선적’ 결산을 이루는 성과도 있었으니 1940년 安廓의 저술로 나온 『朝鮮武士英雄傳』이 그것이다. 화랑이 대표하는 무사적 정신이란 文弱과 대비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으며 그렇기에 무사정신은 곧 국가가 요구한 바람직한 국민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尙武精神은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를 만들고, 그 주체로서 국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애국심이라는 시민종교의 敎義의 하나로서 발견된 것이었다.
Modern East Asian intellectuals who were shocked by the overwhelming military strength of Western powers began to search for the origins of its national crises. They finally concluded that the reason was in the lack of militaristic spirit amongst the traditional East Asian world. Such an awakening led them to criticize their country or people who had been scholarship-oriented for so long which had thus brought along all kinds of national crises. ‘Scholarship-oriented’ means paying high respect to scholars or literary men, whilst showing the cold shoulder to military works. The superiority of literary service to military service was evident in premodern East Asia, and this kind of diagnosis inevitably led to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strengthening military power. The discovery of the importance of militaristic spirit for national revival was common and almost simultaneous in East Asian countries, i.e. Japan, China, and Korea. In Korea, nation-state ideologues invented men who attained conspicuous achievements especially in the military field in Korean history, for example, Yi Sunshin or Euljimundeok as ‘national heroes’. In this context, ‘Hwarang’ was also reinvented as ‘Korean Bushido’ in that period. Liang Qichao, the modern Chinese nation-state ideologue, had great and wide influences on Korea. During his exile in Japan, Liang as an enthusiastic journalist, concentrated all his energy on nation-building. As part of the planning, he intended to change the Chinese people into ‘new people’ constituting a ‘new nation’. He was also eager to invent patriotism as a new civil religion suitable for the new nation. Of course, Liang stipulated new creeds of the religion. One of the creeds was militaristic spirit. According to Liang, all weaknesses in body and mind of the new nation must be eliminated. He maintained “China should erase scholarship-oriented tendency and enhance militaristic spirit to be reborn into a true civilized nation.” For him, militaristic spirit was a revelation of patriotism. Liang wrote the book “Chinese Bushido” in 1904 to concretely shape the creed. Liang’s emphasis on militaristic spirit or Bushido was greatly and directly influenced by Nitobe Inazo and his book “Bushido, the Soul of Japan.” Nitobe’s book was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in Philadelphia. Bushido was invented by him as Yamato Tamashi (Soul of Japan). Before the book, the term bushido had hardly been used. But directly after its publication, bushido was widely recognized as Yamato Tamashi in Japan and abroad. Nitobe compared bushido to medieval European chivalry and emphasized that such an excellent tradition also existed in medieval Japan. It was an outcried objection to Western Europeans or Americans who regarded Japan as uncivilized. Regardless of his intention, as soon as it was invented as Soul of Japan, bushido began to be taken advantage of by nation-state ideologues very effectively, perhaps including Nitobe, as the creed required to all Japanese People. In that respect, bushido became a civil religion in Japan. It was read through by B. H. Chamberlain, who was a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and one of the foremost British Japanologists active in Japan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In his article “the Invention of a New Religion” in 1912, Chamberlain said Mikado-worship and Japan-worship “is the new Japanese religion.” Futhermore he pointed out “as for Bushido, so modern a thing is it that neither Kæmpfer, Siebold, Satow, nor Rein -- all men knowing their Japan by heart”, “Bushido was unknown until a decade or two ago! The very word appears in no dictionary, native or foreign, before the year 1900”, and “Bushido, as an institution or a code of rules, has never existed.” ‘The year 1900’ indicates the time of the publication of “Bushido, the Soul of Japan.”
Ⅰ. ‘화랑기마동상’과 ‘통일전’
Ⅱ. 英雄, 英雄을 呼名하는 申采浩
Ⅲ. 尙武精神, 그리고 그 對蹠으로서의 文弱
Ⅳ. 梁啓超의 新民說과 尙武精神
Ⅴ. 朝鮮의 亡國論
Ⅵ. 軍人精神과 국민 만들기
Ⅶ. 尙武精神의 체현으로서의 花郞과 武士道
Ⅷ.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