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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7世紀 阿彌陀佛像의 圖像 硏究

Study on Sculptural Images of the Seventh Century Amitā Buddha

DOI : 10.35160/sjekh.2012.04.10.129

무량수불에서 아미타불로의 불명의 변화는 중국에서 6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수ㆍ당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는 아미타신앙이 서방정토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확실히 자리 잡고, 아미타불의 위치가 장수기원에서 구제자로 변화하는 신앙형태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7세기 무렵 서방정토 중심의 아미타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무량수불에서 아미타불로의 명칭변화가 확인된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ㆍ백제의 함락, 신라와 당의 전쟁 등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에 따른 신앙형태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후반에는 연기지역 발견 아미타불상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아미타불명이 확인된다. 또한 협시보살의 도상을 통해 아미타불로 추정되는 상이 확인된다. 이 상들에서는 이전에 확인되지 않던 새로운 도상이 보인다. 본존에서는 다양한 수인이 나타나며, 「선도산 마애삼존불」이나 「군위석굴 삼존석불」의 양 협시 보살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의 도상으로 언급되는 보관 화불과 보병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연기지역 발견 아미타불상에서는 다존의 구성, 줄기가 있는 연화대좌 등이 확인된다. 다양한 수인, 협시보살 보관 화불과 보병 등은 중국에서 수ㆍ당대부터 확인되는 것으로 새로운 아미타신앙과 함께 새로운 도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존의 구성은 중국 남조의 영향이 확인되나 당대의 영향이 함께 확인되며, 이전에 확인되지 않던 줄기가 있는 연화대좌가 연기지역 아미타불상에 무량수불에서 아미타불로의 불명의 변화는 중국에서 6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수ㆍ당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는 아미타신앙이 서방정토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확실히 자리 잡고, 아미타불의 위치가 장수기원에서 구제자로 변화하는 신앙 형태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7세기 무렵 서방정토 중심의 아미타 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무량수불에서 아미타불로의 명칭변화가 확인된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ㆍ백제의 함락, 신라와 당의 전쟁 등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에 따른 신앙형태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후반에는 연기지역 발견 아미타불상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아미타불명이 확인된다. 또한 협시보살의 도상을 통해 아미타불로 추정되는 상이 확인된다. 이 상들에서는 이전에 확인되지 않던 새로운 도상이 보인다. 본존에서는 다양한 수인이 나타나며, 「선도산 마애삼존불」이나 「군위석굴 삼존석불」의 양 협시 보살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의 도상으로 언급되는 보관 화불과 보병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연기지역 발견 아미타불상에서는 다존의 구성, 줄기가 있는 연화대좌 등이 확인된다. 다양한 수인, 협시보살 보관 화불과 보병 등은 중국에서 수ㆍ당대부터 확인되는 것으로 새로운 아미타신앙과 함께 새로운 도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존의 구성은 중국 남조의 영향이 확인되나 당대의 영향이 함께 확인되며, 이전에 확인되지 않던 줄기가 있는 연화대좌가 연기지역 아미타불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수ㆍ당대의 아미타도상에서 줄기가 있는 연화대좌가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7세기에는 아미타도상이 명확하게는 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새로운 아미타신앙과 함께 아미타도상이 유입되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이후의 아미타도상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7세기에 아미타불상을 살펴봄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도상의 유입과 분명한 아미타도상이 성립되기 이전, 아미타도상의 유입 초기 도상들을 알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Amitā” (阿彌陀), a new alternative name for the “Wuliangshou” Buddha (無量壽, Buddha of Immeasurable Life) appeared in the late sixth century China and grew prevalent by Sui and Tang dynasties. The change of its name took place as the cult settled into a belief centered by the Western Pure Land and the status of Amitā Buddha changed from the one who grants long life to an icon of salvation. The cult of Amitā began to prevail in Korea around the seventh century, and the same transition of designation from “Muryangsu” (無量壽) to “Amitā” took place. It presumably took place in line with changing forms of belief due to the turmoil caused by the frequent battles around the fall of Koguryŏ and Paekje kingdoms. At present, the earliest culptural piece inscribed with the name “Amitā” and another inferred as an Amitā Buddha are found among the late seventh century Korean Buddhist sculpture, and both possess some unprecedented stylistic features. Other variety of mudras than the one assuring protection and granting wishes are found in the main Buddha. Features of Avalokiteśvara and Mahasthamaprapta such as crowned transformed image of a Buddha and jeweled bottles appear, as exemplified by the pair of flanking bodhisattvas in the stone-relief triad of Mt. Sŏndo and the stone triad of Kunwi Grotto. In case of the Amitā steles found in Yŏn’gi area a stemmed lotus flower seat and composition featuring multiple Buddhas are found. New features such as additional variety of mudras, crowned bodhisattvas and jeweled bottles are found in Sui and Tang dynasty examples, and their emergence in Korea at this time are thought to be influenced by an introduction of the new form of belief and image from the Chinese empires. The multiple Buddha images have traces of Southern Chinese dynasties style together with Tang dynasty, while the unprecedented stemmed louts seats found in the Yŏn’gi steles can be seen as effected Sui and Tang dynasty examples of Amitā sculpture, where stemmed lotus seats frequently appear. Although the image of the Amitā Buddha appears not to have been fully established by the seventh century, introduction of the new image with the cult of Amitā Buddha nonetheless was reproduced to influence later Korean images of Amitā Buddha. The seventh century examples of Amitā Buddha images are thus significant in understanding the early forms of Amitā Buddha images before settling down to consistency, as well as aspects of how a new icon was introduced from one culture to another.

Ⅰ. 머리말

Ⅱ. 無量壽佛에서 阿彌陀佛로의 尊名 변화와 阿彌陀信仰

Ⅲ. 7세기 新羅 阿彌陀佛像의 圖像

Ⅳ. 阿彌陀佛像의 새로운 도상 유입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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