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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新羅의 『國史』 編纂과 그 性格

Compilation and Character of Kuksa(National History) in Silla Dynasty

DOI : 10.35160/sjekh.2012.12.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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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각국에서는 역사의 편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시기는 삼국이 같을 수는 없지만, 대개 모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시작할 무렵에 각기 제 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것은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는 국초에 『留記』 1백 권을 지은 바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양왕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에 의하여 『新集』 5권으로 改修되었다. 『留記』는 그 명칭으로 보아서 종래 구전되어 오던 고구려 초기의 여러 가지 종류의 신화·전설이나 왕족의 계보 등을 모아 편찬된 듯한데,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 후반의 소수림왕 때가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백제에서도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에 의하여 『書記』가 편찬되었으며, 그 내용 또한 유사하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6년(545)에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에 의하여 『國史』가 편찬되었으나, 삼국의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國史』의 편찬과정을 『三國史記』의 新羅本紀와 列傳에 보이는 기사를 상호비교하여 다시 살펴본 바, 이사부와 거칠부가 나물왕의 후손, 즉 그 4세손과 5세손이라는 점이며, 이러한 점이 『國史』편찬과정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三國史記』에 보이는 『國史』의 흔적으로는 국호와 왕명 및 관호, 그리고 인명 등에 보이는 내용을 고찰하였다. 『國史』의 에 대해서는 王統의 正統性을 천명하고 나아가 儒敎的인 政治理想에 입각하여 王子의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으며, 그 편찬시기가 바로 진흥왕 6년(545)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지증왕·법흥왕·진흥왕 대에 보이는 정치·사회적 변화가 동 시대에 활약하였던 異斯夫에 의하여 결국 『國史』편찬이 건의되었으며, 그 내용 또한 당시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각하려고 하였다. 신라의 『國史』편찬은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를 중심으로 여러 문사들이 참여하여 완수하였으며, 그 내용으로는 현재 『三國史記』에 보이는 『國史』의 흔적을 바탕으로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紀念塔이라는 데에 공감한다. 그러나 이를 좀 더 세분하면 지증왕과 법흥왕대의 국가와 사회발전을 수록하고, 더 나아가 진흥왕대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왕실세계라든가 나물왕계의 혈연의식 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깊숙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싶다.

With the development of ways of writing, a variety of state supported compilation activities were undertaken, chief among which were national histories. We are told that a work in one hundred volumes entitled Yugi(Extant Records, 留記) was produced in early Koguryo(高句麗) and that this was reworked into a five-volume Sinjip(New Compilation, 新集) in the year 600 by Yi Mun-jin(李文眞) in the reign of King Youngyang(嬰陽王, 590-618). In Paekche(百濟) a history called Seogi(Documentary Records, 書記) was compiled by Kohung(高興) in the reign of King Kun Chogo(近肖古王, 346-375), and the Kuksa(National History) was done in Silla by Yisabu(異斯夫)’s petition the King Jinheung(眞興王) and Keochilbu(居柒夫)’s compilation in 545 in the reign of King Jinheung(眞興王, 540-576). None of these histories has survived, but it is thought that in large part their contents were incorporated by Kim Bu-sik(金富軾) into his twelfth century Samguksagi(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三國史記). Espercially, the main contents of Kuksa(National History) are conjectured not only National name(國號), King name(王名), Official name(官號), Personal name(人名), etc. but also all changed facts included of Silla’s royal familly and Namul(奈勿)’s King lineage. The fact that each of the Three Kingdoms compiled its own history around the time it promulgated a code of laws, elaborated an institutional infrastructure, and began a period of outward expansion likely reflects a common desire to put their sovereign dignity on display both at home and abroad. Accordingly, the compilation of these national historiesmay be regards as monuments to the creation of the Koguryo, Paekche, and Silla centralized aristocratic states.

Ⅰ. 머리말

Ⅱ. 『國史』의 編纂過程

Ⅲ. 『三國史記』에 보이는『國史』의 遺痕

Ⅳ. 『國史』의 性格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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