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4년 고구려는 왜에 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그런데 595년 고구려 승려 혜자가 왜국에 와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왜국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갑자기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문물도 급격히 들어왔다. 그 중간에 20년 동안 교섭에 관한 기록 공백이 존재한다. 그러나 『續日本紀』를 보면 용명천황(585-7)대 遣高句麗使 기록이 보인다. 711년 12월 阿倍狛秋麻呂가 元明天皇에게 자신의 本姓 阿倍를 찾고자 청원하면서 그 기록이 드러났다. 曾祖父인 比等古臣이 고구려에 사신을 다녀오면서 그 姓이 阿倍狛이 되었다고 했다. 그 시기 왜와 고구려의 교섭기록들이 『日本書紀』에서 누락되었던 것을 반영한다. 691년 8월 일본 조정에 들어간 18개 귀족의 家傳 기록 가운데 阿倍氏의 그것도 있었다. 당시 阿倍氏를 대표하는 正宗은 阿倍御主人(635年 - 703年)이었다. 阿倍狛은 阿倍氏 本家에서 6세기 말에 분지되었을 것이며, 阿倍狛秋麻呂의 증조부인 比等古臣의 고구려 使行에 대한 기록은 阿倍臣御主人이 조정에 올린 阿倍氏의 家傳에서 빠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用明天皇(585-7)대 遣高句麗使는 왜의 교섭 필요성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587년 4월 전염병에 감염된 용명천황이 불교에 귀의할 것을 원했고, 불교수용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러자 物部守屋이 홀로 적극 반대했고, 그는 조정에서 고립되었다. 불교의 수용으로 전염병이 진화되기를 바라던 조정의 사람들 대부분이 찬성을 한 셈이다. 이전부터 物部氏와 蘇我氏는 불교 문제로 대립했다. 이제 그 대립이 유혈 충돌로 비화되려하고 있었다. 587년 6월 物部守屋은 자신의 근거지로 물러나 蘇我氏를 중심으로 한 귀족연합세력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蘇我氏가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 눌려있었던 불교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고개를 들었다. 6월 8일 백제사신이 왜국에 오자 善信阿尼 등은 蘇我馬子에게 백제로의 유학을 청했다. 그러자 蘇我馬子는 직접 백제사신에게 그것을 부탁했다. 그는 불교를 수입하려는 사람들을 적극후원했다. 이는 용명천황대 阿倍狛比等古臣의 고구려 使行 시기·목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 物部氏와 대결 중인 그는 불교 수용기치 아래 조정의 사람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한반도로부터 金銅 佛像과 佛具, 經典 등 불교문화자원의 수입이 필요했다. 보다 다양하고 양적으로 풍부한 불교문물 수입하게 위해 지금까지 접촉이 많지 않았던 과거의 적국 고구려와도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다. 587년 7월 무력대결이 벌어졌고 大臣인 蘇我氏가 大連인 物部氏를 제거했다. 蘇我氏의 독단적인 체제가 만들어졌고, 불교 수입은 급물살을 탔을 것이다. 고구려 평원왕대 수의 중국대륙 통일이 눈앞에 있었다. 신라를 견제해줄 수 있는 왜국, 그 사신의 고구려 도착은 평양 조정에 호재가 되었을 것이다. 불교수입을 원하는 蘇我氏와 평원왕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589년 수의 중국 통일은 양국의 교섭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활발한 교습의 흔적은 阿倍狛·大半狛 등 왜국의 고구려외교 전담 성씨에서도 나타난다.
Koguryeo(高句麗) in 570’s four years three times dispatched envoys to Japan(倭國), but ended without results. Suddenly in 595, Koguryeo monk, Heja(慧子) arrived in Japan, and became a teacher of holiness fetuses Prince(聖德太子). Koguryo civilization rapidly came to Japan, Koguryeo’s political influence has increased in Japan. There are spaces for 20 years between the two periods. On the record of the posterity, Around 587 years the Japanese envoys were dispatched to Koguryeo. The two countries are not suddenly closer. Precedence of diplomatic negotiations would exist. 711 December AhbaeKoma(阿倍狛) Aki-Maro(秋麻呂) petition to the Emperor of Japan(天皇) to find their original Family name Ahbae(阿倍). Because his Grandfather(阿倍比等古臣) envoy to Koguryo, their Family name caught Koma(狛), an ancient Japanese-style notation which means Koguryeo. It is revealed that Japan’s envoy dispatched Goguryeo in 587. In 580 late Koguryo and Japan’s negotiation records reflect that had been missing.
Ⅰ. 머리말
Ⅱ. 阿倍?朝臣秋麻呂의 請本姓과 그 배경
Ⅲ.『日本書紀』에서 遣高句麗使 기록의 누락과 阿倍氏 正宗
Ⅳ. 用明天皇대(585-7) 蘇我氏 와 物部氏
Ⅴ. 蘇我馬氏의 執權과 阿倍?比等古臣의 고구려 使行
Ⅵ.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