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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천총·숭덕 연간(1627-1643) 청-조선 會寧 開市 질서의 형성 과정

천총 연간 후금은 경제적인 수요 충족과 와르카 쇄환의 진행을 목적으로, 회령에서의 개시를 요구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북변의 경제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회령 개시를 회피하고자 했으나, 후금은 심양에서 별도의 인원을 차인으로 회령에 파견하여 개시를 진행하고자 했다. 이러한 차인 파견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후금 측 차인을 접대하고 차인을 수행하는 인원에게 식량을 지급해야 했다. 게다가 회령 개시에 파견된 차인들은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는 위세에 기대어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심지어는 홍타이지의 명을 거짓으로 꾸민 ‘가짜 차인’이 회령 개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식량 지급, 즉 공궤와 관련해서도 천총 2년(1628) 양국은 대동한 상인에게는 공궤를 지급하지 않는 방안에 합의했으나, 천총 5년(1631) 파견된 후금 차인이 상인에게까지 공궤 지급을 강요했으며, 천총 6년(1632)에는 후금 측이 공식적으로 상인에 대한 공궤 지급을 요구했다. 결국 조선에서는 차인 외에도 상인에게까지 공궤를 지급하게 되었다. 북변의 경제적 부담을 초래한 회령 개시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천총 5년 이래로 양국을 왕래하는 사신단에 상인을 대동하여 교역을 진행하는 ‘사행 무역’을 대안으로서 제기하기 시작했다. 천총 5-8년 사이의 교섭으로 양국이 사행 무역 진행에 합의하자, 천총 8년(1634) 조선은 사행 무역의 시행을 지렛대로 하여 회령 개시의 폐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회령 개시와 연관된 닝구타 등지에 지역에 존재한 ‘지역적 수요’는 사행 무역의 방식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후금은 회령 개시의 폐지를 적극 반대했다. 천총 9년(1635) 조선에서는 회령 개시의 질서를 백성들 간의 자유 교역으로 전환하여, 개시에 파견된 후금 차인들로 인해 발생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홍타이지 또한 심양에서 차인을 파견하는 것의 문제점에 공감하기는 했으나, 개시 질서의 혼란을 우려하여 양국의 지방 관원이 개시를 관할하는 방안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병자호란 이후 회령 개시는 숭덕 3년(1638)에 재개되었다. 청 측은 닝구타 지역의 관원에게 호부의 공문을 지급하여 회령 개시에 파견하였다. 다만 청 측이 개시 사실을 조선에 통보하지 않았고, 청 측 인원들이 자신들이 지참한 문서를 칙서로 잘못 통보하며 당시 조선 북방의 지방관들은 개시 준비 및 청측 인원 접대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은 회령 개시와 관련된 절차를 정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청 측 파견 인원의 접대 절목을 정비하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 천총 연간에 후금이 강제하려 했던 접대 수준을 조선 측에 관철시킨 것이었다. 숭덕 7년(1642) 회령 개시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서는 숭덕 3년 이후로 조선 측이 회령 개시에 파견된 청 측 인원들에 대한 접대의 절목을 일정 부분 갖춘 부분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만 북방의 좋지 못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정해진 공궤 수량을 준수하지 못했던 정황도 존재했다. 그리고 당시 닝구타에서 파견된 인원이 적정선 이상으로 공궤를 요구한 사항을 통해, 천총 연간 후반 조선의 기대와는 달리 차인 파견으로 발생한 각종 폐단들은 양국의 지방 인원이 개시를 관할하는 상황에서도 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숭덕 7년의 사례에서는 이전 시점에서도 지적된 ‘가짜 차인’과 비슷한 문제도 부각되었다. 사안의 조사 과정에서, 일부 인원들이 칙사를 ‘僞稱’하여 칙사의 수준에 준하는 수준의 접대를 받으려 했던 정황이 드러났던 것이다. 정황상 당시 회령 개시에 파견된 청 측 인원들은 결코 칙사의 명목으로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양국 간 당사자의 진술이 엇갈렸기에, 청 측에서는 사안의 처리 과정에서 칙사의 ‘僞稱’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공론화를 피하려 했다. 이를 대신하여 청 측은 조선 측에서도 인정했던 사안인 접대의 미비라는 점을 부각시키되, 조선 측 인원의 선처를 요청하며 사건을 정리하려 했다. 아마도 회령 개시에서 칙사의 ‘僞稱’이라는 사안이 부각될 경우, 차후 조선 측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은폐한 것으로 보인다.

During the Tiancong era(1627-1636), the demand for a trade market in Hoeryong(會寧) by Later Jin was not merely an economic necessity but a strategic move to advance the repatriation of Warka. In contrast, Joseon, grappling with a deteriorating economic situation in the northern area, was hesitant to engage with the Hoeryong trade market. Later Jin attempted to conduct the trade market by dispatching envoys from Shenyang(瀋陽) to Hoeryong. Due to this dispatch of envoys, Joseon had to treat Later Jin personnel and provide food to their attendants. Furthermore, the personnel dispatched to the Hoeryong trade market posed various challenges for Joseon. These challenges were often based on the prestige of having been dispatched under the orders of Hong Taiji, with even a 'fake envoy' who forged Hong Taiji's orders appearing at the Hoeryong trade market. The issue of food provision also became a point of contention. In the second year of Tiancong(1628), the two countries agreed not to provide food to merchants who accompanied them. However, in the 5th year of Tiancong(1631), a Later Jin envoy arbitrarily demanded that food be provided to its merchants, and in the 6th year of Tiancong(1632), Later Jin officially demanded that food be provided to its merchants. As a result, Joseon ended up paying not only envoys but also merchants, adding to their economic burden. To address the economic burden caused by the Hoeryong trade market on the northern border, Joseon proposed the concept of 'envoy trade' as an alternative. This involved conducting trade by accompanying merchants on envoys traveling between the two countries, a proposal that was first made in the 5th year of Tiancong. When the two countries agreed to proceed with the envoy trade, in the 8th year of Tiancong(1634), Joseon attempted to abolish the Hoeryong trade market by using the implementation of the envoy trade as leverage. However, the 'local demand' that existed in Ningguta and other areas related to the Hoeryong trade market could not be replaced by envoy trade, leading to active opposition from Later Jin against the abolition of the Hoeryong trade market. In the 9th year of Tiancong(1635), Joseon attempted to resolve the problems caused by the Later Jin envoys dispatched to the trade market by converting the order of the Hoeryong trade market into free trade. Hong Taiji also sympathized with the problems of dispatching envoys from Shenyang. However, in consideration of maintaining order in the trade market, Later Jin promoted the transition to a plan in which local officials of both countries mutually control the trade market. After the 1637 Qing Invasion of Joseon, the Hoeryong trade market was reopened in the 3rd year of Chongde(1638). Qing gave an official letter from the Board of Revenue to an official in the Ningguta region and dispatched it to the Hoeryong trade market. However, the Qing did not notify Joseon of their participation in the trade market. Qing personnel incorrectly reported the documents they brought as royal edicts, causing Joseon to experience twists and turns in preparing the trade market and hosting Qing personnel. In this process, the two countries reorganized procedures related to the Hoeryong trade market. At that time, the protocol for treating Qing personnel appeared to be at the level that Later Jin tried to implement in Joseon during the Tiancong era. Through the incident that occurred at the Hoeryong trade market in the 7th year of Chongde(1642), it can be seen that there is a situation in which Joseon has established a specific protocol for the treatment of Qing personnel dispatched to the Hoeryong trade market. However, there were also circumstances in which it was impossible to comply with the set amount of food provided due to the unfavorable economic situation in the northern region.

Ⅰ. 머리말

Ⅱ 천총 연간 회령 개시의 진행 과정: 인원 파견 문제와 供饋 문제의 전개

Ⅲ. 조선의 사행 무역 추진과 회령 개시의 질서 변화: 개시 철폐 시도의 좌절과 후금 측 인원 파견의 변화

Ⅳ. 숭덕 연간 회령 개시에서의 청 측 인원 접대 문제: 숭덕 3년(1638)과 7년(1642)의 사례를 중심으로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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