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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6~7세기 국제정세의 변동과 익산

Th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Iksan in the 6th and 7th Centuries

본 논문의 목적은 6~7세기 익산지역의 부상과 위상을 구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따른 백제의 대응과 그 속에서 익산이 어떻게 부상하며, 그 위상을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6~7세기 중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남조와 북조의 대립에서 북조의 우위가 확인되고, 결국 북주를 대신한 수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에서의 통일 왕조의 등장은 한반도에 긴장을 가져왔고, 백제는 남조 중심의 외교 정책에서 탈피하여 현실적으로 북조의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면 외교로전환하였다. 『수서』에 기술된 백제의 양단책은 고구려와 중국 왕조와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백제의 대외 정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수서』를 편찬할 당시 백제를 바라본 당의 시각이 반영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 이후 대 신라전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옛 가야 지역을 둘러싼 진출과 방어가 현안이 되었다. 6세기 후반 익산의 개발은 물류 집산지와 익산-전주-남원을 거쳐 가야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상에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6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왕궁리유적의 청자 연화준편과 북주의 오행대포, 익산 낭산으로 비정되는 알야산성 기사는 이를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 또한 사비 천도를 기점으로 중방을 중심으로 동방과 남방이 연결되는 5방제가 성립되었으나 대 신라전의 격화로 중방과 동방 사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익산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무왕의 즉위 이후기록에 보이는 대 신라전은 총 13회로 가장 치열하였다. 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익산은 거점으로서 더욱 가치가 높아졌다.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점차 신라 영역 내로 전진하였고, 이는 신라가 위급함을 당나라에 알린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통해서 무왕의 익산 경영이 성공하였음을 나타내준다. 7세기 익산의 위상에 관한 기존 성과는 천도설, 별도설, 별부설, 복도설, 이궁설, 경영설로 요약된다. 여러 이견이 있고 각 견해는 보완이 필요하지만, 모두 익산을 중시하였다는 점은 공통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익산의 위상과 관련된 문헌의 경우 동서 양성이 주목되었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 중국의 복도설과 통할 수 있는 동서 양성은 여러 가능성이 있다. 공주와 부여로 보는 입장이 우세하나 사비를 제외할 경우 공산성과 왕궁리유적이사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포진하여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두 지역이 모두 군사적거점이었고, 왕이 자주 행차하였다는 점은 이를 보여주는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the rise and status of Iksan in the 6th and 7th centuries. To this end, we examined Baekje's response to changes in the situation in East Asia, how Iksan emerged, and how it was positioned. In the 6th and 7th centuries, China was in a period of upheaval. The emergence of the unified dynasty in China brought tensions to the Korean Peninsula, and Baekje shifted away from its Southern dynasties-centered foreign policy and switched to a two-sided diplomacy that reacted sensitively to changes in the situation of the Northern dynasties in reality. Baekje's two-sided policy described in 『Suseo』 shows its foreign policy, which is agonizing over between Goguryeo and the Chinese dynasty. In Baekje, the advancement and defense surrounding the old Gaya region became an issue as the importance of the against Silla War emerged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of Kansansung. Iksan's development in the late 6th century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it is on a transportation route that connects the logistics and collection areas to the Gaya region. The accounts of Alyasanseong(閼也山城) Fortress, which are criticized as Yeonhwa-Junpyeon(蓮花罇 片), the celadon of the remains of Wanggung-ri(王宮里遺蹟), Ohaengdaepo(五行大布) in Bukju, and Nangsan in Iksan, serve as the basis for this. In addition, after the five-pang(五方) were installed, Iksan, which can complemen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entral-pang(中方) and eastern-pang(東方), was inevitably emphasized due to the intensification of the against Silla War. The existing achievements regarding the status of Iksan in the 7th century can be summarized into Cheondo theory(遷都說), Byeoldo theory(別都說), Byeolbou theory(別部說), Corridor theory(複都說), Igung theory(離宮說), and Management theory(經營說). There are several possibilities for East-West provinces(東西 兩城) that can be connected to China's corridor theory regarding the status of Iksan. In particular, when Xavi was excluded, it seems that the ruins of Gongsanseong Fortress and the remains Wanggung-ri were located north and south of Sabi, and played a suitable role. The fact that both regions were military bases and the king frequented will provide a solid basis for this.

Ⅰ. 머리말

Ⅱ. 6~7세기 중국의 정세 변동과 백제의 대응

Ⅲ. 6세기 후반 익산지역의 부상

Ⅳ. 7세기 초반 익산지역의 위상과 가치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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