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일간에 이루어졌던 의식다례에 관해서 『대마도종가문서』와 『증정교린지』를 중심으로 고찰했다. 왜관의 모습과 일본 사신의 행렬에 관해서는 『동래부사접왜사도』와 『조선도회』의 그림을 참고했다. 다례는 조일간의 국가 의례에 있어서 격식 있는 의식이었으며, 일본 사신들의 조선 방문 때 접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산 왜관에서 거행한 숙배례 및 연향 등도 정해진 절차에 의해 엄숙히 진행되었으나,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서로 자유롭게 교류했다는 점도 『조선도회』의 그림에서 알 수 있었다. 동래부사와 부산첨사가 일본과의 의례를 담당했으며, 조정의 의견을 대변한 역관들이 일본과의 교류에 있어서 실질적인 존재였던 점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국가의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이전의 전례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상황으로 약식으로 치루어졌을 때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양국 간에 신경을 쓰고 문서로 남기고 있었다. 관리들의 서장뿐만 아니라, 『관수일기』를 통해서도 왜관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의 보고서를 통해 일본 사신의 구체적인 이름과 선박의 이름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 조일관계의 의례에 있어서 다례는 양국의 법식에 따라 엄숙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은 일본에서 온 사신들에게 각각 별도로 다례를 실시했고, 다례를 한 다음날에 연향과 별도의 선물도 전했으며, 예단목록을 적은 문서는 미리 전달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에게 행한 접대는 대마도번의 중재로 통신사 일행이 다녀가는 역참마다 이루어졌고, 사신의 계급에 따라 쌀 등의 생필품도 차등을 두어 지급되었다. 이는 당시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에도 막부의 의도도 함축되었다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조선과 일본은 왜관을 통해 외교적 교류뿐만 아니라, 사적인 교류와 문물의 왕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정해진 세견선 이외에도 별도의 선박들이 무수히 드나들며 예법에 따라 사신 모두 따로 접대해야 했다는 사실에 조선 정부의 경제적인 부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왜관은 일본인들을 가둔 공간이 아니라,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양국의 문화가 응축된 특별한 공간이었다고 사료된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Tsusima Souke archives and Jeungjeong-gyorinji with regard to the ritual tea ceremonies of the Joseon Dynasty and Japan. An additional analysis is presented on the state of the Japanese pavilion and the procession of Japanese envoys, referring to the pictures of Dongnae busa jeop waesado and Joseon zue. The formal national tea ceremony played an important role when Japanese envoys visited the Joseon Dynasty. Worship and banquets were solemnly held at the Busan Waegwan, but the scene where Japanese and Joseon Dynasty Joseons interacted freely with each other is also confirmed in Joseon zue. Dongrae-Busa and Busan-Cheomsa were in charge of the ceremony with Japan on behalf of the Imperial Court. The translators who were in charge were substantially important in the exchanges with Japan. When holding national ceremonies in both countries, precedent was very important, and if the ceremony was simplified, it was carefully recorded in documents so it would not set a precedent. Not only the letters of officials, but also the daily life at Waegwan and the name of the Japanese envoy and the name of the ship can be found in the records of the Waegwan Keeper’s Diary. This research found that the tea ceremony was solemnly held in accordance with the regulations of both countries to welcome both Japanese and Joseon Dynasty envoys. Joseon conducted a tea ceremony for each of the messengers who arrived from Japan, and held a feast and gave gifts the day after the ceremony. On the other hand, entertainment given for the Joseon Tsushinshi (Joseon communication officials) on the Japanese side was carried out in places where the Tsushinshi group passed by through the mediation of Tsushima. It is thought that the intention of the Edo shogunate to weaken the power of the local daimyo was included. The messengers were provided with rice and daily necessities according to their class. In the late Joseon period, Joseon and Japan not only had diplomatic exchanges at Waegwan, but also private exchanges and cultural exchanges. In addition to the old ships from Japan, countless ships came and went, and the economic burden of the Joseon Dynasty, which had to entertain all the messengers individually, is recorded. It seems that a Japanese-style building was not a place where Japanese people felt restricted, but was a special space where Japanese and Joseons easily interacted and the culture of both countries was condensed.
서 론
본 론
결 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