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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蔡希範의 1754년 梅社 활동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Chae Hee Beom and Maesa(梅社) in 1754 and his short sequel

DOI : 10.17293/dbkcls.2024.99.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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黙隱 蔡希範은 1754년 51세의 나이로 梅社의 동인이 되어서 趙載浩, 趙維鎭, 南玉, 李鳳煥과 함께 매화시를 주고 받았다. 이들은 모두 40수씩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 2백 수가 『梅社五詠』에 전한다. 조재호, 조유진은 풍양 조씨 소론 명문가 출신이고, 나머지 세 명은 地處가 한미한 寒士였다. 이때 채희범이 남긴 매화시를 분석해 보면, 세 가지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채희범은 자신이 읊은 매화에서 그 淸孤한 속성에 주목하였다. 청고는 맑고 배타적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매화의 속성임과 동시에 이들이 속한 매사의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채희범은 매사의 宗匠이라고 할 만한 조재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고, 그의 시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조재호가 한미한 처지의 자신을 愛顧하여 자신과 교유하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였고, 채희범은 스스로 매사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셋째, 채희범은 매화의 落花를 읊을 때 슬픔과 애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그가 낙화를 존재의 소멸이나 끝으로 보지 않고 생애주기 전체의 일부 내지 과정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매사 활동 이후로 채희범은 黃柑別製의 장원급제를 하여 文名을 날리게 되고, 영조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763년 계미통신사 파견을 앞두고 그의 벗 이봉환은 당시 통신사 정사로 내정되어 있던 서명응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친구 채희범과 남옥을 文士로서 동행할 것을 청탁하였다. 실제로 이때 사행단 명단에 채희범의 이름이 올랐는데, 채희범은 자신이 서얼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免役을 기도하였다. 이 때문에 채희범은 사행단의 명단에서 빠지게 되고 대신 남옥이 제술관에 발탁되어 일본을 다녀오게 되었다. 이후 채희범은 봉상시주부, 연원찰방 등의 벼슬을 역임하다가 1770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몇 달 뒤 이봉환과 남옥이 경인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어 세상을 떠났고, 8년 전인 1762년 임오화변에 연루되어 조재호와 조유진이 처형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채희범은 天壽를 누린 셈이다. 채희범이 매사 활동을 할 때 자신의 지처가 한미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생각해 보면, 통신사행을 앞두고 서얼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운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지만, 이 또한 조선 후기 지처가 한미한 문사가 선택한 삶의 한 모습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apricot blossom poems by Chae Hee Beom(蔡希範, 1704~1770). These poems were written when he was invited to Maesa(梅社) in 1754. Maesa had five members. Jo Jae Ho(趙載浩), the leader of the group and his nephew Jo Yoo Jin(趙維鎭) invited Chae Hee Beom, Yi Bong Hwan(李鳳煥), and Nam Ok(南玉). These members came from renowned family members of soron(少論) and seoeol literati. From the moment of opening buds to that of falling blossoms, they met 7 times a month to write poems. During this period, each member created 40 poems. After reading the poems by Chae Hee Beom, we can infer these three things. First, he liked the elegant and independent characteristics of the apricot blossom. Second, he had a deep respect for Jo Jae Ho, and he himself felt proud for being a member of Maesa. Third, describing the falling moment of flowers, his poems did not feel so sad or hurt as other poems did. A few years later, Chae Hee Beom had a chance to be a member of Tongsinsa(通信使, Choson’s envoy to Japan), but he refused and tried to dodge the duty, and finally was replaced by Nam Ok. Chae Hee Beom was a low class intellctual and seldom had an opportunity to work for Choson. His having been recommended as a member of Tongsinsa was a great chance to serve for his fatherland. But he would not accept this recommendation, and lived 8 more years till his death. It was not easy to understand why he did not acccpt this recommendation, but it should be regarded as a way of life a seoeol literat had chosen in the 18th century in Choson.

1. 들어가며

2. 1754년 梅社 활동

3. 매사 활동 이후의 채희범

4.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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