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커버이미지 없음
KCI등재 학술저널

조선후기 漢詩四家의 竟陵派 인식과 이해

The Recognition and Understanding of Jingling Coterie(竟陵派) of Hansisaga in the Late Joseon Dynasty

DOI : 10.17293/dbkcls.2024.99.233
  • 101

본고는 ‘조선후기 문단의 竟陵派 수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漢詩四家라 불리던 李德懋·柳得恭·朴齊家·李書九의 경릉파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정도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네 사람의 경릉파 관련 언급을 분석하여 네 사람이 경릉파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했으며, 그 인식 양상이 갖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는 인근에 모여 살면서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한시사가라 불리며 문학적 지향 또한 유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모두가 명말청초 서적의 유입과 학풍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경릉파에 대해서도 모두 깊이 경도되었다고 알려졌다. 이덕무는 조선후기 문인 중 경릉파에 대해 가장 많은 언급을 남긴 인물로, 총 16회의 기록이 보인다. 이덕무의 경릉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23세 때이지만, 그 이전에 경릉파를 접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덕무는 경릉파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입장이었는데, 특히 『詩歸』를 중심으로 한 시비평가로서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의 문집에는 경릉파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다.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유득공 2회, 박제가 3회, 이서구 1회 정도이다. 내용도 경릉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기보다는, 비유 대상으로서 『시귀』나 鍾惺, 鍾ㆍ譚이 활용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한시사가가 경릉파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덕무를 제외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에게 경릉파는 관심과 흠모의 대상은 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시사가의 경릉파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세대 차이와 개인적 취향의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덕무와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의 나이 차는 각각 7세ㆍ9세ㆍ13세이므로, 이덕무:세 사람=스승세대:제자세대라 할 수 있다. 이런 나이 차는 조선후기 문단에서 경릉파를 수용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덕무가 경릉파를 처음 접했을 때는 1760년대 초반으로, 조선 문단에서 경릉파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 지대하였다. 하지만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의 경릉파 언급은 대체로 1775년 이후로, 조선 문단에서 경릉파가 이미 널리 알려졌을 때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경릉파는 더이상 새로운 문학 사조로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한시사가는 모두 擬古派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이었기에, 反擬古를 주장했던 공안파와 경릉파에 호의적이었고 개성적이고 참신한 시풍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릉파의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기괴한 시풍에 대해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는 이덕무만큼 호의적이진 않았다. 이는 유득공이 ‘地理名物學’에, 박제가는 ‘經濟之學’에, 이서구는 ‘經濟實用’에 더 관심이 집중된 이유도 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한시사가의 경릉파에 대한 인식 양상의 차이는 경릉파가 1770년대 중후반에 조선 문단에서 보편적인 문학 유파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조선후기 문인들 사이에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했던 유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As part of a study on the acceptance of Jingling Coterie(竟陵派)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examine the perceptions and acceptance patterns of Jingling Coteri of the Lee Deok-mu(李德懋), Yoo Deuk-gong(柳得恭), Park Je-ga(朴齊家), Lee Seo-gu(李書九), which were called the Hansisaga(漢詩四家). Lee Deok-mu read Jingling Coterie books and recognized their existence and arguments already in his early 20s. Lee Deok-mu particularly became to be interested in Jingling Coteri through the poem grade book titled 『Sigui(詩歸)』 critisized and selected by Jong Seong(鍾惺) and Dam WonChun(譚元春) and highly evaluated their features as critics based on the book. And by accepting Jingling Coterie, the poem of Lee Deok-mu showed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remarkably. 1) Overexpression of sadness 2) Sensory and delicate expression 3) A unique and very new form of aesthetics. Currently, references to Jingling Coteri are confirmed twice, three times, and once, respectively, in the collection of writings of Yoo Deuk-gong, Park Je-ga, and Lee Seo-gu. The content is not a direct reference to criticism of Jingling Coteri literature, but only to the extent that 『Sigui』, Jong Seong, Dam WonChun are used as objects of comparison. Although it is called the the Hansisaga and has achieved similar literary achievements, there is a difference in perception of Jingling Coteri. The cause is 1) generational difference 2) propensity difference. As a result, Jingling Coteri was a new and interesting literary school for Lee Deok-mu, who accepted in the early period, but it was no longer a new school for the other three. In addition, the extreme sadness and bizarre descriptions pursued by the Jingling Coteri's poetry could be divided into likes and dislikes depending on individual tendencies.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Lee Deok-mu and the other three show a difference in their position on Jingling Coteri.

1. 머리말

2. 한시사가의 경릉파 인식과 이해

3. 한시사가의 경릉파 인식 양상의 의미

4. 맺음말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