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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번역] 장안의 '긴 평안'에서 길이 슬퍼했노라 : 일본 견당사의 시학

Suffering Everlasting Sorrow in Chang'an's “Everlasting Tranquility” : The Poetics of Japanese Missions to the Tang Court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일본 황실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실에 약 20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중국의 입장에서 일본 사신은, 다른 많은 국가나 정치조직들이 그러했듯이, 수도 장안에 있는 천자의 황실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신은 비용이 많이 들면서 복잡한 외교 정책이었으며, 이것은 7세기 후반 한반도의 신라 통일의 격랑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후 사신들은 중국으로 일본 승려 및 유학생을,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 사절과 승려를 일본으로 운송하고, 서적, 불상 그리고 종교적 물품을 일본으로 수입 가능하게 하면서 점점 더 문화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였다. 사신단들은 상호 이해 가능한 문어 곧 ‘공통 문어(scripta franca)’를 공유하면서 구어로서 공통 언어(lingua franca)가 결여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독특한 역설적 의사소통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사신단과 중국의 영접자들은 비록 사소한 잡담은 불가능하였지만, 한시를 수창하면서 가장 기교적이고 학식 있는 시적 은유를 동반한 ‘필담’을 통해 서로를 축복할 수 있었다. 일본어 자국어시(우타, 歌)와 한시[간시(漢詩)]는 나나와 항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출발하고 돌아오는 일본 사절에 늘 동반되었다. 당나라 사신들은 시의 거울을 통해 어떻게 나타날까? 당나라를 그저 꿈속에서 그리고 글로 표현하는 대신 실제로 중국에 간 극소수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그들의 경험을 시에 새겨 놓았을까? 그리고 왜 일본어 시와 한시에서 사신들은 암시적으로 다르게 묘사되는가? 시는 사신들을 보는 독특한 창을 제공한다. 한문산문으로 제작된 중국과 일본의 공식 역사나 여행기와 같은 사행 관련 자료들과는 달리, 견당사 관련 시들은 일본어 시와 한시 두 가지 모두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당사들이 제작한 시나 그들을 위해 제작된 시들은 역사적 그림에 지리적, 정치적, 언어적 경계가 물리적 세계와 상당히 다르게 그려지는, ‘시적 지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더한다. 본고는 중국행 사신의 물리적 궤적과 도중에 詩作을 위한 다양한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출발 전에 쓰여진 시는 대개 자국어로 쓰여졌고, 그 시들은 20여 편이 『만엽집』로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면 언어와 장르의 선택은 반대가 되었다: 사신들은 스스로 간시(漢詩)를 쓰거나, 혹은 남아 있는 시의 코퍼스로부터 판단하면, 당 현종에서부터 중국의 동료학생, 승려 또는 동료와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누구에서건 한시를 더 자주 받았다. 본고는 이후 ‘견당사의 시학’에 대한 유형학을 살펴보고, 왜 자국어 시가 한시보다 훨씬 더 통일된 시적 형틀을 따랐는지 탐구한다. 본고는 일본의 견당사에 대한 당나라 주재 일본 공관에 대한 다채로운 학문에 詩的 관점을 더하고 동아시아 외교에서 차지하는 시의 특별한 역할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물리적 궤적과 詩的 궤적

2. 일본에서: 出行의 시학

3. 중국에서: 出行의 시학

4. 몸은 일본에 마음은 중국에: 향수병의 시학

5. 전망: 시학, 타당성 그리고 사행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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