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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第129號.jpg
KCI등재 학술저널

세종대 풍수학에 대한 인식과 그 실상 - 세종 15년(1433) ‘풍수학’ 설치 과정을 중심으로

Perceptions and Practices of Geomancy in 15th Century Joseon : Focusing on the Establishment of the 'Pungsuhak' Organization in the 15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33)-

DOI : 10.52557/tpsh.2024.12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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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세종 15년(1433) ‘풍수학’ 설치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15세기 전반 풍수학의 실태와 풍수학에 대한 인식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종 15년 칠월, 최양선이 제기한 경복궁 명당 논쟁으로 조정에서 풍수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종 12년에 제기되었으나 해결되지 않고 남겨졌던 헌릉 옆 고갯길 논쟁도 재점화되었다. 세종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 서적을 연구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하였다. 안숭선은 풍수학 연구가 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를 표하였다. 이에 세종은 풍수학연구의 소임을 맡은 학자들에게 별좌의 직함을 부여하고 도제조 1인과 제조 2인을 두어 ‘풍수학’ 조직을 설치하였다. ‘풍수학’은 여러 풍수학 서적과 고전을 근거로 경복궁 명당 논쟁과 헌릉 옆 고갯길 논쟁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풍수학’ 설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지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풍수학을 경연에서 강론해서는 안된다는 점, 둘째, 풍수학은 국왕이 직접 공부할만한 학문이 아니라는 점, 셋째, 집현전에서 풍수학을 연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주희를 예로 들어풍수학을 강론하는 것은 유자가 하지 못할 일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풍수학’ 조직을 통한 풍수학 연구를 강행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풍수학을 관장하는 조직으로는 실무 관부인 서운관과 교육 및 취재를 담당하는 조직인 십학 음양학이 병존하였다. 서운관은 녹관직제와는 별도로 업무에 따라 천문·금루·풍수학의 세개의 조직으로 나뉘어 운영되었고, 십학 음양학은 제조 2인, 제거 1인, 별좌 1인으로 구성된 조직으로천문·지리·성명·복과 등의 다양한 분야의 교육과 취재를 아울러 관장하였다. 세종은 풍수학 논쟁이 제기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풍수학을 관장하는 기존의 조직을 이용하지 않고 ‘풍수학’을 설치하여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에 서운관의 풍수학 조직과 십학 음양학의 풍수학 분야는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actual state of geomancy (pungsu, 風水) in the early 15th century and examine perceptions of geomancy from various perspectives by investigating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Pungsuhak (風水學)” organization. In the seventh month of the 15th year of King Sejong (世宗)'s reign (1433), a debate arose in the court over the auspicious site of Gyeongbok-gung (景福宮) Palace, initiated by the geomancer Choi Yang-seon (崔揚善). This led to a geomantic debate in the court, reigniting the controversy over the mountain pass next to Heolleung (獻陵), which had been raised but remained unresolved in the 12th year of Sejong's reign (1430). Despite opposition from his officials, King Sejong ordered scholars from the Jiphyeonjeon to study geomantic texts to resolve the issues. He formalized the scholars' research duties by assigning them official titles and establishing the “Pungsuhak” organization. The establishment of “Pungsuhak” faced considerable opposition. The key points of contention were threefold: first, that geomancy should not be discussed in royal lectures; second, that geomancy was not a subject worthy of the king's personal study; and third, that the Jiphyeonjeon should not be engaged in the study of geomancy. King Sejong countered these objections by citing Zhu Xi (朱熹)'s example, arguing that discussing geomancy was not beyond the scope of a Confucian scholar's duties, and he proceeded with the research through the “Pungsuhak” organization. At the time, two other organizations oversaw geomancy: the Seoun-gwan (書雲觀), an administrative body, and the Yin-Yang Studies (陰陽學) of the Ten Schools (十學), an organization responsible for education and examinations. However, when the geomantic debate arose, Sejong chose not to utilize these existing organizations but instead established the “Pungsuhak” organization, entrusting the scholars of Jiphyeonjeon with the study of geomancy. Consequently, the geomancy departments within the Seoun-gwan and Yin-Yang Studies remained in a disadvantaged position.

Ⅰ. 서론

Ⅱ. 풍수학 연구의 필요성 대두와 ‘풍수학’ 설치

Ⅲ. ‘풍수학’ 설치 과정에서 보이는 풍수학에 대한 인식

Ⅳ. ‘풍수학’ 조직과 십학 음양학·서운관의 실태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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